무협/SF

음마전기 - 3부

본문

3. 검황지녀(劍皇之女)




"언니?"




"으응."




언니라 불리는 검황의 딸 백리빈은 자신을 따르는 소소영의 말에도 모호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소소영은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 아침에도 백리빈이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이상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언제나 총명하고 아름다운. 정말 여자의 자신의 눈에도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미모를 가진 백리빈이었다. 백옥으로 만든듯 섬세하고 하얀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칠흑같이 긴 머리, 그 어떤 거장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미려한 곡선을 그리는 얼굴은 이미 이 상태로도 조물주의 걸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대신 소소영 빼고는 친밀한 사이가 거의 없는 외톨이.


바로 그녀가 미래의 천하제일미녀라는 서지화(曙之花-새벽꽃) 백리빈이었다. 당연히 현재도 천하의 미녀를 꼽는데 반드시 들어간다는 검황의 장중보옥.




그런데 이곳 정천무관에서 나와 외부 합숙 훈련지인 보타암에 도착한 후부터 빈 언니가 무언가 깊은 고민에 잠긴 듯 해보였다.




"언니? 무슨 고민에 빠진거야. 나한테도 얘기해줘."




그제서야 소소영을 돌아보는 백리빈. 보석같이 빛나는 눈이 본래의 광채를 되찾았다.




"미안해. 누군가 이곳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이곳을? 어떻게? 여긴 보타암의 여승님들이 계시잖아."




"응."




그랬다. 이곳은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암이었다. 이곳은 보타산의 중턱에 있는 여승들로만 이루어진 문파로, 섬이기 때문에 반드시 배를 통해 건너와야만 했으며 폐쇄적이라 무림인의 상륙은 애초에 허용하지도 않는 곳이었다. 당연히 이 섬에는 약간의 민가들만 있을뿐,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금지였다. 당연히 외부인이 있으리라 상상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언니는 그 공... 그게 있자나."




소소영은 말을 하다가 황급히 얼버무렸지만 백리빈은 소소영이 말하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도 그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백리빈.


백리빈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고수 중의 고수, 심안의 경지에 들어간 자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공감각(空感覺)을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이 공감각이란 주변에 자신이 지배하는 공간 안에서 어떤 변화라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일종의 특수한 육감이었다. 혹자는 공간 지배력이라고도 부르는데 보지 않아도 일정 거리 내라면 아무리 탁월한 살수라 할지라도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오랜 수련을 통해 심안의 경지를 엿보고 얻은 감각이 아니라 선천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에 초고수의 그것보다는 제약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면 이미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감지할 수 없는 먼 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면?


백리빈은 별빛 같은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암절벽을 가진 멋진 봉우리들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내가 예민했었나봐."




"응. 언니. 그리고 아침먹을 시간이야. 얼른 가지 않으면 배 곯는다구. 꼬르륵 꼬르륵."




"그래."




백리빈은 소소영의 귀여운 과장된 몸짓에 살풋 웃음을 지으며 문을 나섰다.








향긋한 음식냄새에 이끌리듯 백리빈과 소소영이 식당에 들어가니 이미 수십 명의 여관도들이 재잘대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실 보타암도 암자라 음식은 절 음식뿐으로 간소하긴 했지만 종류만 해도 예닐곱 가지가 넘어가 보타암에서 꽤 신경 쓰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자자. 식사시간은 앞으로 2각 후면 끝입니다. 서둘러서 수업을 늦지 말도록."




정천무관 여관도들에게는 공포의 암호랑이로 불리는 여자 기숙사감 아미삼화 초정인(아미오화 중 셋째)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네"라고 답하며 다시 재잘대며 식사를 한다. 하지만 대답만 할뿐 그녀의 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잡담만 나누기 바쁘다. 그에 초정인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언니. 2각밖에 없어 얼른 식사해야 해. 게다가 난 치장도 안했단 말이야."




울상을 지으며 소소영이 재촉하자 두 소녀는 급하게 채소로 만들어진 요리를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들곤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그리고 막 소소영이 급하게 수저를 입에 넣을려는 찰나.




"호오. 서지화(曙之花-새벽꽃) 백리빈께서 여기 계셨군요. 호호호."




얼굴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뽐내려는 듯 화려한 옷에 짙은 분가루를 날리며 어떤 여자가 그녀들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음색이 높은 자극적인 목소리를 그녀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 네."




그 목소리에 백리빈은 담담히 대꾸했지만 소소영은 눈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의맹 부맹주의 딸 사마모홍이었다. 칠절장왕 사마중을 아버지로 둔 이 처녀는 난데없이 나타나 정천무관 제일화의 자리를 빼앗아간 백리빈이 너무나 못마땅한듯 매일 이렇게 나타나 꼬투리를 잡아 보는 것이 일과였다.


사실 그녀도 워낙 육감적인 몸매와 미모를 가졌기에 그녀를 추종하는 남자관도들이 많았지만 남성 전부의 추앙을 받았던 화려한 시절을 기억하는 그녀로서는 백리빈이 심히 못마땅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저는 오늘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답니다. 서지화께서 어제부터 몸이 안 좋아서 오늘 쉰다고 하던데요?"




말끝마다 서지화 서지화. 무림의 원로인 자비불황이 백리빈을 보고 붙여준 말이지만 사마모홍은 그게 아니꼬운지 매번 만날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하는 말이었다. 욕은 아니지만 소소영은 자신의 언니를 비꼬는듯해 항상 사마모홍이 서지화라고 부를때마다 자신이 더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게다가 일부러인지 자신이 한 살 더 나이가 많으면서도 "께서"라고 붙이는 걸 항상 잊어버리지 않는 사마모홍. 반말보다는 낫지만 일부러 하는 존칭도 묘한 비아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소소영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울컥한 소소영과는 다르게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어찌 보면 차가운 사람이 백리빈 언니였다.




"괜찮습니다.."




"언제나 몸조심 해주세요. 서지화께서 아프다면 저뿐만 아니라 정천무관의 오백여 남자관도들도 밤을 새며 걱정할 것이랍니다."




".. 네."




"흥. 재미없긴."




사마모홍은 언제나 백리빈과의 대화가 이런 식으로 끝나버리는 게 불만스러웠지만 익히 경험했던 것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겨우 대답만 하는 그녀를 보면 무슨 인형을 대하는 것 같아 그녀로서도 더 괴롭히기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그녀가 백리빈를 견제하는 것도 그녀의 개인적인 이유 만이 아니라 현재 정파 구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육대세가와 구대문파의 오랜 반목이 불러온 결과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마모홍은 육대세가의 수장격인 사마세가 사마중의 딸이고 서지화라는 가당찮은 별호까지 얻은 인형은 무당의 속가제자인 천검천황의 딸이었다. 사이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는 사이.




하지만 사마모홍은 그런 정의맹 내의 분위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취미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자신의 인기를 가져간 인형을 말로나마 괴롭혀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겐 그런 것보다 이 썰렁한 암자가 더 거슬렸다.




"이게 뭐야. 정말 아무것도 없네."




사마모홍은 익숙하고 따분한 정천무관의 생활에서 벗어나 경치가 좋은 섬이라기에 혹해서 참가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망망고도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외부 수련을 빠졌을 것이다. 아마 다음번에도 이런 게 있다면 반드시 빠지리라 다짐하며 그녀를 항상 따라다니는 당혜미, 남궁산산과 함께 식당을 나섰다.


그녀들이 나서자 묵묵히 식사를 하던 소소영이 백리빈에게 말을 건넸다.




"빈 언니. 한번이라도 그 모홍 언니의 말에 받아치지 그래?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해 죽겟어."




"괜찮아. 싸움은 싫어."




"뭐 싸움이 일어나면 어때. 언니는 그 사마모홍보다 훨씬 강하자나. 힘으로 눌러서 담부턴 입도 뻥긋하게 못 만들면 되지."




하지만 차분히 고개를 젓는 백리빈.




"그래도 싸움은 싫어. 그리고 그녀가 다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아."




"언니이~. 언니는 너무 착해."




소소영은 밥 먹다 말고 언니가 귀여워서 못살겠다는 듯이 달라붙어 껴안는다. 그때 다시금 들려오는 초정인의 목소리.




"먹으면서 들으세요. 알고 있겠지만 보름간 했던 보타암에서 하는 수업은 오늘로서 마치고. 내일부터는 근처의 무인도에서 하는 현장 수업입니다."




그러자 식사하던 누군가가 물었다.




"현장 수업이요?"




초정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네. 작년에도 했던 생존 훈련이죠. 오기 전에 안내서에 적혀있듯이 위급시의 행동이라든가 무인도에서의 자력 생존이라든가 하는 걸 배우게 될 거에요."




"아~아....."




"나중에 분명히 여러분한테 도움이 될 꺼니까 최대한 성의 있게 배우세요. 그리고 중요한건 이것도 평가에 들어간다는 사실."




평가라는 말을 듣곤 여관도들은 볼멘소리를 내었다.




"네에...."




여관도들이 내는 볼멘소리에 초정인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상당히 높은 점수로 평가에 반영이 되니까 잊지 마세요."




"네."




"내일 아침에 훈련장으로 이동할 배가 올겁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 짐 싸는 걸 잊지 마세요. 한 달간 무인도에서 생활하니까 세면도구나 응급약 같은 것도 반드시 챙겨가야 합니다. 쓸데없이 화장품 같은 건 넣지 말구요.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런 거 신경 전혀 안 써도 되요."




뭐 다들 아는 이야기였지만 노파심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초정인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알아서들 잘하지만 한두 명의 아이들은 꼭 잊어버릴 때가 있어서 이렇게 잔소리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별조차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달조차 그믐이라 가끔 파도 소리만 들릴듯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조용했다. 그런 바다 위의 커다란 범선 안에서 음마황과 색랑 삼십 여명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보타암에 있는 정천무관의 여관도들은 알면 놀라 까무러치겠지만 그녀들을 마중 올 배에 타고 있던 정의맹 파사대를 음마황과 색랑들이 습격해 세 명만 빼놓고 깡그리 바다 속에 쳐 넣어버렸던 것이다. 파사대는 이름 그대로 무림의 악적들을 추적해 단죄하는 정의맹의 이름 높은 무력단체였지만 바다 위라 방심한데다 음마황이라는 초고수를 막지 못해 제대로 저항조차 제대로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반면 색랑들은 중상자 두 명을 제외하곤 피해가 없는 거의 일방적인 전투였다.




"자령. 배 상태는?"




음마황의 물음에 자령이라 불린 하얀 피부를 가진 미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너무나도 잘생긴 귀공자풍의 남자인데 이 남자가 색마중의 색마 색랑이라니. 보통사람은 눈으로 보아도 믿기지 않을 터였다.




"확인했습니다. 지존. 다행히 전투 중에 파손된 부분이 별로 없더군요. 피가 튄 돛을 바꾸고 약간의 처치만 하면 충분히 여자애들을 모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음마황은 자령의 말에 비릿하게 웃더니 다시 입을 물었다




"크큭. 교관복과 가면은 어떤가?"




"역시 모두 준비됐습니다."




음마황은 자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루 정도 후에 보타암에 도착하겠나?"




"예."




음마황의 말에 모두 얼굴색이 환해졌다. 모두들 쫄깃한 무림 여고수의 그곳을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던 것이다. 그러한 색랑들의 들뜬 모습에 음마황이 일침을 가했다.




"벌써부터 들뜨지 말아. 여재애들을 태우고 나서 천옥도에 도착해도 우리들은 한동안 교관노릇을 해야 한다. 만약 허튼 수작을 해서 일을 망치는 놈은 반드시 죽인다."




음마황이 나지막한 어조로 얘기했지만 그 특유의 살기 덕분에 모든 색랑들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넷. 지존"




"흠. 그럼 천옥도에서의 일정 같은 것은 이 놈들을 고문해서 알아내면 되겠군. 책망 그리고 구순 너희 둘이 들어가서 모든걸 알아와라."




음마황이 말이 끝나자 얼굴에 심한 흉터가 있는 잔인해 보이는 남자와 평범함 이웃집 만두가게 아저씨처럼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꾸벅 고개를 끄덕이더니 뱃전에 있는 파사대원 두명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온다."




여관도 중의 누군가 커다란 범선이 수평선 위로 나타나자 함성을 질렀다. 이 시대의 시간관념이 그렇지만 배가 도착하는 시간은 거의 정해진 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중간에 바람의 영향을 받기도 너무 쉽고 작은 사고가 났다하면 한 두 시진은 물론 하루 이틀 까지도 차이가 날 수도 있는게 범선의 항해였다. 물론 주산군도는 근해(近海)라 하루까지는 차이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서너 시진 정도 까지도 기다릴 수도 있었던 여관도들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70여명의 한창 발랄할 때의 여관도들은 언제까지 기다려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예정시간에 고작 반 시진(1시간)만에 배가 나타나자 너도 나도 함성을 지르고 선착장에 우르르 몰려갔다.




"이런. 난간이 없으니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모조리 몰려가며 일으키는 소동을 보고 여자관도들을 인솔하고 있던 아미삼화 초정인은 황급히 제지해봤지만 콧방귀도 끼지 않는 여관도들은 그저 재잘대며 몰려가기 바쁠뿐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핏대가 솟는 초정인, 하나 하나만 따로 놓고 보면 그렇게 예쁘고 조신한 애들인데 모아놓기만 하면 모두 말괄량이로 변신하는 여관도들 때문에 골치를 썩는게 이번 뿐만이 아니었다.




"으..."




두통이 오는듯 초정인이 뒷목을 잡고 있자 옆에 서있던 보타암의 여승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여관도 중 누군가 재잘대며 폴짝폴짝 뛰다 잘못 딛어 기우뚱 해지는게 보이는 초정인.




"어~ 어."






"푸~웅덩."




"꺄~~~~악!!!"




"바다에 빠졌어! 꺅! 꺄악!"




바다에 누군가 떨어지자 난리 법석이 아니었다. 황급히 초정인이 뛰어가는 찰라에도 그저 꺅꺅 괴성을 지를뿐 아무도 바다에 뛰어들려는 이가 하나 없다. 지들도 무공을 배워놓고는 도대체 어디다 쓸려고 하는건지.


더욱 가관인건 분명히 이전 수업 때는 모두 수영을 잘했던 아이들인데 그저 바다에 조금 빠졌다고 놀라서 온갖 물을 다 마시며 바다속에서 허우적대는 아이였다. 초정인의 불쌍한 이마는 아이를 구하려 바다에 뛰어드는 찰라에도 내 천(川)자를 그리고 있었다.






범선이란 눈에 보인다고 선착장에 순식간에 오는게 아니다. 수평선에 나타나 선착장에 닿기까지만 해도 한식경(30분)이 걸리는 것이었다. 천해(淺海)는 해류가 일정치 않고 돛조차 피기 애매한 상황이 많아 숙련되지 않은 선원이라면 접안까지 반시진이 넘어갈 수 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범선이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인 초정인이었다. 바다에 빠진 아이를 구해 눈물 콧물 훌쩍거리는 걸 달래고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자신 또한 옷을 갈아입는데 정신없이 바빴던 것이다. 빠진 아이는 수홍연이라는 화산파의 여제자였는데 열 다섯이나 먹어놓고도 자기 앞가림을 못한다는게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애를 보면 무공을 익히는 정천무관이란 존재자체에 대해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자신이 생각하기로는 최소한 여관도를 받을 때 만큼은 무공보다는 강단이 있는 품성의 아이를 고려하는게 더 옳을 듯 싶다.


어쨋건 뒤처리를 하고 막상 수홍연에게 화를 내려고 해도 애가 놀랜탓인지 잔뜩 주눅 들어있어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뭐 나름 교훈은 되었을테니 그걸 위안 삼아 선착장에 데리고 가는 초정인이다.




"오셨군요. 정의맹분들이시죠?"




여자관도들을 이끌고 가던 아미삼화 초정인은 배에서 잘생긴 20대 후반의 남자가 내려오자 인사를 건넸다.




"네. 정의맹 파사대 대주 기원전입니다. 그런데 오다보니 누군가 바다에 빠지는 걸 봤는데 괜찮습니까?"




초정인은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도 그걸 보다니 역시 정의맹에서 교관으로 파견나올 고수답구나 생각하는 한편 자신이 맡고 있는 아이라 무안하기 이를 때 없었다.




"네. 그냥 발을 잘못 딛어 바다에 빠진 것 뿐이에요. 다친데도 없구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일반 양민도 아니고 무림을 익히는 무림인이 그런다는건 쫌........"




파사대 대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길 하자 초정인도 쓴웃음을 따라 지었다.




"가끔가다 그런 아이들이 있어요. 무공을 익혀도 어디에 쓸 줄 잘 모르는 아이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야무지고 똑똑하답니다."




"그렇군요.. 흠..."




파사대주 기원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른분들은."




초정인이 둘러보자 파사대 대주를 제외한 모두 제각각 다른 가면을 쓰고 있어 위압적이랄까 여튼 정체를 감추는 듯해 불쾌했다.




"아 가면말이죠. 그건 교육생에게 엄하게 대하기 위해서 일부러 쓴 겁니다. 남자관도들은 모르겠는데 여자관도들의 저번 교육은 정말 엉망이었던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정천무관뿐 아니라 정의맹에서도 제대로 하라고 질책이 떨어졌습니다."


"끄응..."




파사대 대장의 말에 초정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이 그랬기 때문이다. 작년 여자들의 생존 훈련 교육은 최악이었다. 자력 생존은 커녕 끼니때마다 밥을 날라줘야 했고 게다가 훈련도중에 집단 식중독까지 걸려서 중간에 철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까 여관도가 물에 빠진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도 걱정스럽군요. 해서 저는 이번 훈련동안 엄하게 해서 최대한 성과를 내 볼 작정입니다. 물론 대원들도 그럴 작정이구요. 아무리 여자라도 정천무관에 들어갔으면 집에서 기르는 꽃이 아니라 밖에 나둬도 죽지 않는 야생화정도는 만들어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뭐. 그렇죠."




자신도 여자이긴 하지만 공감하는 부분이라 초정인은 감히 딴지를 걸 수 없었다.




"그러시군요. 아 그리고 통성명이 늦었는데 아미삼화 초정인 맞으시죠?"




"네."




"그럼 협조 부탁드리고. 여기 정의맹의 명령서니 읽어보시길. 자 그럼 아이들을 배에 태웁시다."




파사대장 기원전이 명령서를 건네자 그걸 받아들고 초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리따운 무림의 꽃들과 하는 하는 항해는 즐거울까? 어떻게 보면 이곳에는 내노라하는 각파의 장중보옥이 좁은 배안에 갖혀 있는 셈이었고 그것들의 미모를 지나가다 훔쳐보기만 해도 남자라면 누구라도 부러워하는 것 일테다. 하지만 그것도 겨우 한 시진 정도 뿐이었다..


결론만 이야기 한다면 여자 애들을 데리고 하는 항해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뒤지닥거리 하느라 파사대 대원 전부가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 배에 올라탄지 한 시진만에 하나 둘씩 멀미를 시작하더니 두 시진이 지나자 배에 올라탄 여자 애들 중 반수는 뱃전에서 고기밥을 주고 있던 것이었다. 파사대원 대부분이 얼굴을 찡그린채 배 곳곳에 뿌려진 시큼한 토사물을 치워야 했고.


고수는 멀미를 하지 않는가? 상식적으로 고수는 멀미를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대부분의 고수도 멀미를 한다. 몸의 평형과 균형감각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고수는 멀미를 하진 않지만 그 정도의 경지는 쉽사리 볼 수 있는게 아니고 이 여자 애들처럼 고작 십여년에서 이십여년 정도의 내공을 가졌다면 일반인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단지 회복과 적응이 빠른 정도?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뱃전에서 토악질을 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헛 구역질을 하며 찔찔 울기까지 했고 덕분에 아미삼화 초정인이 정신이 탈출하기 시작할 무렵. 다행하게도 배안에는 그 유명한 무림의(武林醫)인 절강신의 숙주경이 타고 있었다. 게다가 단지 점혈만으로 뱃 멀미를 고치는 호랑이 가면의 사마대원까지 나서자 얼마지나지 않아 멀미하는 사람이 사라지게 되었고 거대한 범선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휴. 이걸로 멀미하는 애는 마지막인가."




산동신의 숙주경이 마지막으로 남은 여자애에게 약을 먹이곤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그러자 옆에서 거들어주고 있던 초정인이 말을 건넸다.




"네. 신의께서 타고 계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이 배 안에 계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작년에 식중독 사건 때문에 이리로 오게 된거야. 최소한 내가 있으면 작년처럼 식중독 때문에 중간에 철수하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늘그막에 여자애들 뒤치닥거리나 하라니.. 원."




숙주경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자 무안해진 초정인.




"죄송합니다."




"아. 아니야. 어떻게 보면 이 애들 돌보는 것도 재밌다네. 이 아이도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니 정말 예쁘고 말이야."




멀미에 지쳐 그물침대에 자고 있는 깜찍하게 생긴 여관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숙주경. 편안히 자고 있는 모습에 흐믓한 미소가 떠올랐다.




"게다가 이렇게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수 있는게 여기뿐이겠지. 다른 곳에서는 언감생심 손도 댈 수도 없는 아이들이니 말이야. 혹시나 이걸로 자네 상관에게 고하지는 말게나."




남여가 유별한 이 시대에 아무리 의사라해도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건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초정인은 인자한 노인같은 숙주경이 고맙기만 할 뿐이었다. 머리정도 쓰다듬는 거야 저 정도 연배의 할아버지라면 의례 하는 것이고 그것보단 자기 혼자 멀미하는 애들을 맡으려면 엄청난 고생이었는데 그게 해결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물론이죠. 이렇게 도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그런데 항주에서 주산군도까지 뱃길도 상당한데 그건 어떻게 왔나?"




"파도가 얕아서 그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상당히 파도가 거칠군요."




초정인은 새삼 사방에서 삐걱삐걱하며 배가 흔들리는게 느껴졌다. 150여명이나 탈수 있는 거선인데 내부가 이렇게 흔들리니 아무래도 밖은 심상치 않을터. 그에 다시 말을 덧붙였다.




"폭풍우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요."




"으음. 듣기로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라 하더군. 섬에 도착하고 나선 어쩔지 모르겠어."




"아. 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거죠?"




초정인의 말에 조금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숙주경. 그러다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사실 여관도들의 행선지는 워낙 보안을 다하느라 인솔 책임자인 초정인조차 어디로 가는지 몰랐었다.




"천옥도(天獄島)라네. 송 초(初) 때 감옥이 있던 섬이지."




이름이 주는 어감이랄까. 초정인은 천옥도란 말을 듣자 왠지 섬찟한 기분이 들어 되물었다.




"천옥도요?"




"하하.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네. 이젠 폐허만 남은 그저 그런 무인도야. 작년에 고른 섬이 너무 작아 아이들이 생존훈련때 제대로 수렵을 못한 이유도 있는것 같아서 일부러 좀 큼지막한 섬을 고르다 보니 그곳으로 했다고 하는군. 게다가 폐허인 천마옥에 본진을 차리면 수고도 덜고 말이야."




"천마옥.... "




"이름은 꺼림직하지만 이미 백여 년 전에 폐옥된 곳이라네 폐허만 있을뿐 아무것도 없을꺼야. 파사대가 미리 정찰까지 갔다 왔는데 온갖 바다 새만 있다고 하더군."




그 말에 초정인은 조금 안심한듯 얼굴이 펴졌다.




"네. 그렇군요."




그 모습에 황급히 덧붙이는 숙주경.




"아. 물론 자네도 알겠지만 천옥도니 천마옥이니 말을 해서 아이들 심란하게 하지 말게나."




"물론이죠. 아 그리고 철 대협에게 맡겨 놓은 아이를 보러 가야 할것 같네요."




여자의 몸이니 옆에 있지 않으면 혹시 나쁜 짓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러게나."




초정인이 옆방으로 왔을때 이미 철 대협이라 불린 호랑이가면의 파사대원은 사라져 있었다. 다만 16-17 세 정도 보이는 여자애가 편안하게 침상에 누워 자고 있었을 뿐. 옷매무새를 보니 아무데도 건드린 흔적이 없어보여 더욱이 안심되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호감 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잔정이 있어보이는게 편히 자라고 베개까지 받쳐주고 떠났던 것이다.


초정인은 여자애를 안아 그물 침대에 넣고 자신도 피곤했던 오늘 하루를 정리하며 침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커다란 배안에서 성인 여자는 자기 하나뿐이니 온갖 신경을 곤두 세우느라 정말 피곤했던 것이다. 물론 정의맹 파사대의 이름은 믿지만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는게 남자의 본성이었다. 게다가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 더욱 상대하기 거북했고, 다행히 지금까진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곤 있지만 아직은 마음놓고 여자 애들을 맡길만한 이들은 아니었다. 앞으로 사흘간 더 항해한다고 하니 한눈 팔지 말고 그런 그들을 감시해야 했다.


초정인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조금식 수마에 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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