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십구번홀 - 15부

본문

그만 돌아가죠."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밤바람이 차갑네요."


언덕을 내려와 차가 다니는 큰 길가에 도달할 때까지 그런 정사장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인적이 드문 시간이 되면서 동행한 사람들끼리 하나 둘 엎어지며 갈대 숲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 몸살을 수없이 견뎌온 갈대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꺽인 것은 꺽인대로 꼿꼿한 것은 꼿꼿한대로 흔들리며 또 하루를 견디고 있다.


오늘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수많은 사람들의 부딪김을 견디며 꽂꽂하게 살아있을 것이다.




"술 한잔 할래요?"


"나도 춥군요. 어디 들어갑시다."


호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조용한 분위기의 술집을 찾아 마주 앉았다.


자연이 선물한 광활함과 장엄함은 서로 딱딱한 사무적인 관계를 순화하여 한때나마 서로에게 어깨를 기대로 부등켜 안을 수 있는 감동을 선사했다.


인간이 만든 술은 약간 서먹한 마음이 가신 두 사람에게 어떤 선물을 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도 갖게 만든다.




"김부장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요."


"저를 처음 본 것이 얼마 안됐는데 어떻게 알죠?"


"당돌함에 감탄했어요.


경쟁회사에 뛰어들어 담판을 짓는 솜씨는 감동적이었죠."


"너무 급했어요.


망설일 수 없는 상황에선 누구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되죠."


"김부장이 그날 오지 않았다면 두 회사는 상처를 입었겠죠."


"고뚜루는 물건을 납품했을테고 저희만 상처를 입게 되겠지요."


"아니요. 우리 고뚜루는 그 제품을 납품할 능력이 없었어요.


귀 사로부터 제품공급을 받아 미쑤비쓰에 납품할 계획이었으니까요."


"경쟁회사 제품이 많을텐데 궃이 저희 제품을 납품할 필요가 있었나요?"


"그 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제품을 찾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이번 제품납품은 정사장님이 맡으시지 그랬어요?


저희야 미쑤비쓰에 직접 납품하나 고뚜루를 통해 납품하나 같으니까요."


"미쑤비쓰쪽에서는 딜러를 통한 공급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조사 직접 납품을 원하고 있잖아요. 어차피 규격에 맞는 제품이 귀사의 제품인걸 생각하면 이번일을 사전에 중단시키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럼 앞으로도 미쑤비쓰와의 거래는 저희가 계속 해도 되겠습니까?"


"직접 판매 보다는 저희 고뚜루를 딜러로 활용하는게 무역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저희에게 OEM으로 제품을 공급해 주면 어때요?"


"저희 회사 방침이 딜러와 직판뿐인데 아직은 OEM 방식은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고뚜루는 남의 제품이든 말든 무조건 고뚜루 상표로 된 것만 취급해요.


이번 납품건 양보를 통해 저희 고뚜루와 OEM 공급계약을 검토해 줬으면 좋겠네요."


"저희 회사는 이번 제품에 목숨을 걸고 전력 투구를 한다지만, 고뚜루 같은 큰 회사는 수많은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잖아요. 만약 OEM으로 공급한다면 선불 조건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린 선불로 물건을 확보하지 않아요.


적어도 우리의 영업망을 이용하려는 많은 기업들은 오히려 제품을 창고에 넣어만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죠. 


그런데 그쪽 제품에 대해서만 선불결제를 원한다면 임원진이하 직원들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울거에요."


"다른 제품들은 그렇게 취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희 제품만큼은 선발주, 선결제 조건으로 OEM 계약을 해 줬으면 합니다.


지금까지의 관행으로 거래할 수 있는 제품도 있는 것이고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서라도 거래할 제품이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희 제품도 기존 관행에 맞춰 거래하겠다는 것은 그쪽의 일방적 생각일 뿐이고 저희 쪽 의중은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희는 고뚜루에서 선발주, 선불 조건으로 취급할 만큼의 가치있는 제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자신 만만하군요?"


"목을 건것과 목을 걸지 않은 차이라면 이해 될까요?"


"좋아요. 내일 실무단이 내려오면 신속한 결정을 해 보죠."


술집은 담배 연기로 자욱한 안개를 연상할 정도로 탁해 있다.


의사결정권자와 직접 면담하여 사전조율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은 비즈니스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정작 가슴조려야 할 것은 실질적인 계약서에 서명하는 일까지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


정영옥 사장이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회사일에 집착하지 않고 순순이 내 제의를 받아 들이는 것은 인간적인 대화분위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깨진 후에도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의지를 내일 실무진과 배석한 가운데에서도 유지시키지 않으면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젠 공기가 탁하네요. 자리를 옮길까요?"


"네, 좋아요. 근데 어디로 가죠?"


"호텔로비가 차라리 났겠어요. 공기라도 맑고 좋잖아요."




술집을 나온 두 사람은 호텔 로비에 있는 쇼파에 나란히 앉았다.


호흡기를 짓누르던 담배연기가 없는 것만으로도 한결 홀가분하고 기분이 나아졌다.


"제법 시간이 많이 지났군요. 벌써 열두시네요."


"어머, 벌써 그렇게 됐어요?


김부장이랑 있다보니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있었네."


"자야 낼 아침 골프를 칠텐데, 올라가시죠."


"그렇네요. 올라가요."


"방은 어디루 정하셨어요?"


"제 방은 505호, 김부장님 방은 605호로 정했어요."


"그럼 엘리베이터를 타시죠. 


새벽 골프를 위해선 잠을 잘 필요가 있으니까요."




좁은 공간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의 눈을 마주쳤다.


풀밭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 부끄러운 얼굴이 되고 말았던 나와 달리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정사장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순간적으로 멋적고 서먹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오층이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럼 낼 봐요."


카운터에서 건네받은 열쇠로 605호를 열었다.


넓고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방에 들어서자 마자 욕탕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물이 어느정도 받아질때까지 텔레비젼을 보기 위해 전원을 올리고 욕탕에서도 들릴 정도의 볼륨으로 틀었다.


옷가지를 걸어 붙박이 장에 넣고 발가벗은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아 텔레비젼을 잠시 본 후 그대로 욕탕에 들어가니 욕조에 물이 반쯤 차 있다.


목욕으로 피곤을 풀고 침대에 쭉 뻗어 자고 나면 상쾌한 아침이 시작될 것이다.


양치를 위해 치약을 짜서 잇속 깊은 곳까지 사각사각 칫솔질을 한다.


입에 하얀 포말이 가득하다.


맑은 물로 행구고 샤워기를 틀어 몸에 물을 뿌린 나는 욕조 속에 몸을 깊이 넣었다.


목까지 찰랑이는 욕조속의 뜨거운 물줄기는 온몸의 피곤을 말끔이 빨아내려는 듯 출렁이고 나는 그 흐름에 스르르 잠이 들고 싶다.


왕왕거리는 텔레비젼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수많은 지난날들의 사연들이 아스라한 과거가 되어 한편의 영화처럼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형부 나 예뻐?"


"그럼, 우리 처제가 세상에서 젤 예쁘지."


"근데 왜 이혼한 우리 언니랑 결혼해?"


"언니도 예쁘니까."


"피, 난 아직 처녀란 말야. 형부도 총각이니까 나랑 했어야 하는거 아냐?"


"사랑이란 처녀 총각만의 권리는 아니야.


언니두 내가 좋아하면 처녀와 다를게 뭐있어?


더구나 예쁜 두 아이들까지 덤으로 델구 온다니까 난 너무 신나."


"형부, 그건 어거진거 알아?"


"진심이야."


"형부가 됐으니까 남일 때 보다 좋은건 사실인데, 날 무시한건 넘 심했어."


"처제는 아직 어리구. 또 좋은 남자를 만나기라도 하면 오히려 날 무시할걸."


"몰라요. 암튼 형부야. 언니한테 정말 잘해야돼요."


"물론이지. 우리 처제두 형부 미워하면 안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몸이 차가운 물속에 빠진 느낌이 들어 힘들게 눈을 부비며 떠 보니 욕탕속의 물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긴장과 피곤 속에서 몇시간을 욕탕속에 몸을 담그고 잠들었는지 뒷목이 뻣뻣하다.


가볍게 목운동을 하고 큰 타올로 물기를 닦으며 침대로 걸어 나왔다.


시끄러울 정도로 높였던 볼륨은 들리지 않고 텔레비젼의 전원도 꺼져있고 방안도 조명이 모두 꺼져있다.


내가 욕탕속에서 잠결에 텔레비젼을 어찌 했을 것 같지 않은데 자동적으로 전원 차단 장치가 작동되었나 싶어 침대 옆의 스텐드에 불을 넣었다.


발가벗은 상태로 살짝 침대보를 들고 기어 들어간다.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화사한 봄날의 꽃봉오리처럼 활짝 핀 여인이 누워 있다.


온 몸에 가린 것이라고는 초미니 비키니같은 작은 젖가리게와 양 날개 옆으로 털이 무성하게 삐져나온 팬티 뿐이었다.


불빛의 반대 편으로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얼른 사각팬티를 입고 정사장의 옆에 다시 누웠다.


한 손을 뻗어 잠든 정사장의 머리 밑으로 팔베개를 넣었다.


순결해 보이는 새하얀 등쪽의 속살에 가만히 내 가슴을 붙히고 남은 팔고 그녀의 아랫배 쪽에 손을 뻗어 두 사람의 살결이 최대한 많이 닿도록 밀착시켰다.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는 내 입술이 자연스럽게 정사장의 목덜미에 뜨거운 콧김을 불어 넣게 한다. 정사장이 깨어나지 않도록 호흡을 감추며 따뜻한 체온을 상호 교류하니 찰붙은 살결이 마치 천년을 붙혀 살았던 느낌으로 편안하게 다가왔다.


상체의 밀착만으로 이처럼 아득한 느낌을 전하자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하체의 허벅지 하나를 밀어내듯 한 발로 정사장의 틈을 벌리고 엉덩이 쪽에서부터 두 다리를 엉켜갔다.


밤은 아득한 느낌으로 깊어갔다.


어떤 더 이상의 행동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황홀한 느낌이 뼈 속으로 스며 들었다.


이런 자세로 날이 밝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있다.


육체관계를 보지속에 좆을 넣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단지 서로의 피부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섹스 이상의 충만한 황홀감을 맞볼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행복한 잠에 빠져 든다.




"정영옥이는 이제 김부장님꺼에요."


"무슨 말씀을?"


"제 맘속에 사무치도록 그리움을 준 사람은 김부장님뿐이에요."


"우리 만난건 겨우 두 번 뿐인데 그런 그리움이 쌓일 시간이 있었나요?"


"운명적인 만남이었어요."


"전 처자가 있는 몸이고, 정사장님은 처녀잖아요."


"그런건 게의치 마세요.


결혼같은 것이 저를 얽메이지 않아요.


전 강하기 때문에 그런 관습조차 저에겐 무의미해요."


"하지만 정사장님은 큰기업의 경영자인데 이런 무모한 일을 해야할 이유가 뭐죠?"


"왕위 계승도 버린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김부장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다 버릴 수 있죠."


"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해요.


정사장님의 지금 말씀은 농담으로 알고 있을께요."




정사장이 가슴에 파고 들었다.


아리한 슬픔이 가슴속에 파고 들었다.




모닝콜 전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떠 보니 정사장을 안고 자던 그 모습 그대로 몇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새근거리며 예쁜 콧소리가 귓가에 멤돈다.


살짝 정사장의 목에 눌렸던 팔베게를 빼며 침대를 빠져 나온다.


"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혼자말로 한숨을 내쉬며 아픈 팔을 풀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팔을 돌렸다.


텔레비젼을 틀어 새벽 뉴스를 시청하고 싶지만 곤히 잠든 정사장을 깨우게 될까봐 조심스럽다.


"어머, 벌써 일어났어요?"


"네, 근데 이방엔 언제 왔어요?"


"잠이 안와서 얘기 좀 하려고 왔었어요."


"그때 제가 욕탕 속에서 잠들었나봐요. 죄송해요."


"꿈속에서 김부장님의 품에 안겼었어요. 행복한 느낌이 들었지요."


"그랬어요? 저는 바빠서 정사장님 꿈에 가지 못했는데..."


"잠시 돌아서세요. 옷좀 입게."


나는 돌아선 김에 욕실에 들어가서 양치질과 간단한 세면을 마쳤다.


실내등이 환하게 켜지고 텔레비젼에서는 새벽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여기서 세면 하실래요?"


"그래요. 밤중에 정말 포근했어요."


"실례가 안됐는지 모르겠네요."


"살결 닿는거 정말 싫어해요. 김부장님이 안아 준 느낌은 첨이었어요."


"그럼 제가 팔베게 해 준거 알았어요?"


"행복했어요. 그런 행복을 또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까지 들던걸요."


"죽일 놈이죠. 제가 감히..."


"씻을 동안 골프 준비나 해줘요."




호텔에서 랜트카를 빌려 골프장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바닷바람이 코 끝에 와 닿는다.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직원들은 몇시에 오죠?"


"풀코스 끝나면 올꺼에요."


"그럼 부지런히 쳐야겠네요?"


"저 핸디 잡아줄꺼죠?"


"아뇨, 프로라는 얘길 들었는데 웬 핸디를?"


"남녀 차이를 인정해야죠."


"컥, 정사장님은 웬만한 남자들은 다 이긴다고 들었는데.."


"김부장님, 정사장은 남자랑 쳐도 핸디없이 그냥 쳐 버리는 강골이죠.


정영옥이는 얌전한 숙녀랍니다."


"그럼 저랑 치는 것은 다른 건가요?"


"여인.


적어도 오늘 만큼은 약한 여인의 모습으로 봐 주세요."


"그럼 오늘 계약은 없겠군요?"


"일할 땐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가면 되죠."




정영옥과 나는 나란히 홀을 돌고 있다.


승부를 위한 골프라기 보다는 살아온 많은 날들에 대한 자신만의 고통스러운 추억들을 남김없이 골프공에 실어 하늘 높이 날려 버리고 있었다.


상큼한 아침 햇살은 어느새 뜨거운 태양이 되어 머리 중천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콧잔등에 흐른 땀방울을 영옥의 손수건이 다가와 훔쳐준다.


파릇한 잔디는 발 바닥을 간지럽히듯 힘을 다해 일어서고, 한가롭게 서 있는 나무들은 한 점 구름들이 걸쳐있는 옷걸이 같아 보인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어요?"


"우리 사장님을 대신해서 온거라 약속할 수 없어요."


라운드를 마친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어깨를 기대며 걷고 있다.


"만나려면 이번 처럼 작전을 짜야겠군요?"


"임직원들간에 정례 골프를 추진하면 되지 않을까요?"


"흥, 머저리 임원들하고 골프를 함께 칠 수는 없어요."


"회사의 협력 관계를 돈독히 하다보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다음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죠.


일단 호텔에 실무진들이 도착할 시간이 됐으니까 서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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