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십구번홀 - 6부

본문

"오빠, 일이 엉켜버렸어." 나사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왜? 또 무슨일야?"


"애까지 딸린 년이 발견됐어."


"뭐?"


"유치원 다니는 애까지 있다니까."


"에이, 골프치다 만난 여자랑 설마 애까지 낳았을라구."


"글세, 그러니까 기가 막힐 노릇이지."




퇴근시간에 맞춰 사랑이는 회사 앞 커피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변호사랑 상의할 일을 왜 나한테 와서 그러냐? 엄청 부담스럽네."


"인간탈바가지만 뒤집어 쓴 악마 같은 놈이야.


허구헌날 골프치라며 마누라 등 떠밀어 내던 놈이 속셈은 따로 있었다니까.


골프치다 지 놈처럼 바람피면 꼬투리 잡아서 그년을 안방에 들이앉힐라고 작정한거라니까."




"넌 안 그랬으니까 됐지 뭐."


"아휴, 그러니까 더 억울하지."


"뭐가?"


"그 자식, 운동하고 늦게 들어오면 뭔 껀수 잡을게 없을까 늘상 시비조로 빈정 거렸단 말야.


재밌냐는 둥.


운동이 재미있었냐는 뜻으로 알아듣고 그랬다고 그러면 씨익 웃는게 지금 생각하면 소름끼치더라니까."


"복선을 깔고 얘기하는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겠니. 네가 좋은 뜻으로 알아듣길 잘한거다."


"애 있는 년이 끝이 아닌거 알아?"


"또 있었어?"


"그년도 결국 내 꼴 날꺼야.


사진으로 찍힌 년만 이십명이 넘는걸 보면 그놈의 난봉질이 어떤지 알잖아.


나는 차라리 조강지처로 호적에 기재됐으니까 법적으로 부부재산분할권이라도 갖고 있지만 그년은 씹주고 맘주고 애까지 딸렸으니 쪽박 깨지면 뭘 건지겠어?"


"하하, 상대적으로 너는 행복한 셈이됐네."


"행복? 그렇게 생각해 보면 행복한 여자가 되네."


"맘 정리는 된거니?"


"그 인간 오늘 출근도 못하게 어제부터 밤새 쌈박질 했어.


축 늘어져 자는 걸 보고 나왔으니까 눈 뒤집구 잠에 골아 떨어졌을꺼야."


"쌈질 하는 것을 보니 애정이 아직도 넘치는구나?"


"왜, 쌈하면 애정 있는거야?"


"버리면 싸울 필요도 없잖니."


"억울 하니까 그렇지."


"억울이라..."




미국으로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그녀가 늦게나마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동안 살아온 노력보다 더 많은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가꾸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를 잃은 상실감보다 더 큰 무게로 그녀의 행복을 기원할 수 있었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머나먼 타국에서 이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상실로 통보됐을 때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상실의 슬픔이 한꺼번에 드러나며 민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질듯했다.




날마다 일이 끝나면 먹기 싫다는 동료들을 협박하듯 가까운 술집으로 끌고가서는 상실의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폭주에 겁먹은 더 많은 동료들은 점차 내 주변을 떠나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몇 년동안 소식조차 없던 또 다른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재회의 기쁨을 술로 축하하는 양 떠들어대면서 민지에 대한 상실의 술잔을 기울여야 했다.




봄 기운이 아직 완연하지 않은 날이었다.


추워 두터운 옷을 껴입고도 호호 손을 불어야 이이언을 잡을 수 있었지만 모처럼 라운딩을 위해 초원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환경을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몇 홀을 지나면서도 모처럼의 밝은 태양에 가려 그녀가 옆에 있는줄도 몰랐다.


가무잡잡하게 초봄의 태양에 그을린 그 얼굴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콧날이 날카로우면서도 약간은 낮고 웃음 속에 걸걸한 소리가 섞여 나오면서도 가날픈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귓전에 멤돌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뒤돌아 보며 어서 쫒아 오라고 손짓 하면서도 그녀가 또 다른 사랑으로 다가올 사람이라고는 눈치 채질 못했다.


성큼 걷는다지만 남자 발걸음 보다는 조금 처지는 듯한 작은 보폭이었다.


늘씬하여 다리가 허리보다 길다고 생각 했지만 그냥 남의 여자로서 근사해 보였을 뿐이다.


차갑지만 따갑게 빛나는 햇살이 모자 챙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약간 빈약하다 싶은 가슴을 지나 짤록한 허리로 이어 지는 선이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퍼팅을 시도하고 있는 그녀의 엉덩이 선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슴없이 아름답다 말하고 싶었다.




라운딩이 끝나고 네 사람은 서로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악수를 나눴다.


절도있는 태도로 뒤 돌아서며 성큼 걸어가는 그녀의 태도가 맘에 끌렸다.




"김부장, 저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온천 있는데 들렀다 갈래?"


"온천 좋지요. 하지만 이 근처 온천 있단 얘긴 금시초문인데요?"


"첨인가? 얼마전 발견된거라 아직 소문 없는 곳이야."


"목욕시설도 없겠군요?"


"없어. 그냥 노천에 가마떼기루 천막쳐놓고 장사하는 곳이야."


"물은 좋아요?"


"응, 뜨끈뜨끈 한 것이 개운하더구먼."


"사장님이 좋다고 평할 정도면 그 온천 대박 나겠군요?"


"어, 그럴꺼야."




네 사람은 별다른 이견 없이 새로 발견된 온천을 향해 차를 몰았다.


산 허리쯤을 깎아 만든 작은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평지 한구석에는 가마니를 엮어 만든 초막 같은 집이 있었다.


얼기설기 벌어진 틈으로 뜨거운 온천물이 수증기 되어 연기처럼 솟아 오르고 있었다.


남녀로 나뉘어 옷을 벗고 온천물에 몸을 풍덩 담갔다.


어설프게 구분해 놓은 가마니를 경계로 남탕과 여탕이 구분되어 있었지만 발 아래는 하나로 합쳐진 까닭에 얼굴과 상체 정도만 가려지고 엉덩이 아래 부분은 상대방을 볼려고 작은 시도만 해도 남녀가 서로의 몸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민망한 분위기 였지만 다행이 네 사람은 서로의 몸에 신경쓰지 않고 노천에서 품어내는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맡긴 채 모처럼의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김부장, 어때? 좋지?"


"사장님, 정말 좋은델 발견하셨네요. 이런 원시상태가 얼마나 보존 될지는 몰라도 조금만 늦었다면 시멘트 바닥에 엉덩이 깔고 온천욕할뻔했네요."


"글쎄말일세. 이걸 발견한 사람이 돈이 없어서 망정이지 소문만 퍼지면 금방 개발이다 뭐다 해서 건물 들어서고 뭐 그러면 말짱 꽝되는거지."


"돈이야 많이 벌겠지요 뭐."


"돈? 글쎄, 발견한 사람이 돈 벌겠나? 


이놈 저놈이 죄다 뺏어먹고 나면 남는것도 없을꺼야."


"어딜가나 기생충들 때문에 힘들어요."


"서로 돕고 사는 모양일세."


"공생이란 말씀이죠?"


"그래, 벌면 쓰는 놈도 있어야지."


"사장님처럼 마음을 편히하면 이 세상도 살만한 곳이지요."


"그나저나 젊은여자랑 한 목욕탕에 들어온 기분이 어떤가?" 사장은 나지막히 소리 죽이며 물었다.


"헉, 그렇군요. 가마니로 겨우 나눠진 것 외엔 탕 하나에 다 들어와 있는 셈이군요?"


"자넨 모르고 있었나?"


"생각 안해봤죠."


"좋은 약을 많이 먹어선지 아직까지 기력이 넘친다네."


"회사일에 열중하시니 힘이 필요하시겠죠."


"활력은 일뿐만 아니라 여자에게서도 얻어지는 법이야."


"여자는 상심의 근원이던걸요?"


"가볍게 즐기게. 마음에 담아두면 병나고 탈나는게 여잘세."


"맘에 담지 않고도 즐길수 있는 쉬운 방법이라도 있나요?"


"없지. 각자가 찾아야해."


"사장님은 어떤 방법으로 힘을 얻는데요?"


"여자만 취하고 그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는 방법으로 짐을 던다네."


"그야, 돈 많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모르는 소릴세. 돈많은 노인네를 젊은 여자가 몇푼에 떨어질 것 같은가? 


오히려 젊은 남자들 보다 더 안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게 여자들 심리일세."


"그럼 어떻게 떨어뜨리죠?"


"왕도가 없어. 정을 주지 않는거지."


"여자가 따르면요?"


"난 프로를 쓴다네. 자네들처럼 인생을 걸고 도박하는 여자를 택하지 않지."


"사장님이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프론가요?"


"그래. 모두 돈 때문에 나오는 사람들이니까 뒤탈도 없어."


"그럼 옆에 있는 여자들도 프로겠군요?"


라운드하면서 챙아래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실망감이 엄습했다.


긴 다리와 깔끔하게 돌아서는 모습 등이 모처럼 민지에 대한 상념을 대체할 듯하여 약간 울렁이며 가슴 뛰게 하던 여자들은 그저 사장이 즐기는 프로였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미치자 잠시나마 민지와 비교했던 어리석음에 쓴 웃음이 나왔다.


"아냐, 저놈들은 식구일세."


"사모님이라고요?"


"아니, 딸년들이야."


"노천온천까지 이렇게 같이 와도 되요?"


"나랑 라운딩한 애는 큰딸인데 소박맞고 돌아와선 얼마전부터 집구석에만 쳐박혀 있구, 


자네랑 함께 한 애는 막내 딸인데 골프 입문한지 얼마 안됐어.


골프치자고 애들이 졸라대길래 자네 눈빛도 시들하고 뭔가 상심한 일이 있다 싶어서 얘기도 할겸 자네를 부른걸세."


"맘에 있던 여자분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었습니다.


잊은 줄 알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나선 상심해서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이제라도 사장님 배려 생각해서 정신 차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죠."




가마니 밑으로 살짝 드러나곤 하는 여탕의 늘씬한 다리 모습도 사장딸이라는 얘길 듣고 보니 경건한 마음까지 일었다. 노년을 즐기는 사장 스타일로 봐선 적어도 오늘 여자들은 돈만 뿌리면 몸을 열어주는 부류로 가볍게 생각했던 것들도 경망스러운 판단이었다는 사실에 민망하기 까지 했다.




"자네처럼 젊은 사람을 부장으로 발탁시킨 이유가 뭔지 아나?"


"선배들 제치고 승진한 탓에 시기도 많이 받았지만 잘 해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네같은 공채입사생들이 회사를 이끌어야할 시기가 왔네.


회사는 젊은 머리가 필요하지.


철밥통을 차고 앉아 있는 창업공신들은 더 이상 회사를 발전 시킬 수 없는 노릇이야."


"사장님의 파격적인 조치 덕분에 직원들 사기가 고조됐었죠."


"자네를 눈여겨 본지 오륙년은 족히 될꺼야.


철밥통들이 자네 승진을 엄청 저지했지만 나는 자네를 픽업했고.


내 딸년도 자넬 좋아했었지..."


"저는 따님은 커녕 사모님도 한번 뵌 적이 없는걸요."


"상면만 안했을 뿐이지 자네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고 있었네."




온천욕을 마치고 미쳐 마르지 않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기 위해 차 안은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치렁이며 내려온 머리결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말리기 위한 작은 아우성 속에 행복에 가득찬 그들의 모습이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해가 뉘엊거리며 서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석양을 이루며 붉게 물든 하늘 반대 편에는 둥근 보름달이 얼굴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오봇한 가족 나들이에 우뚝 선 이방인으로서 그들의 행복을 잠시 훔칠 수 있었던 나는 작은 행복속으로 그동안 쌓였던 수심마저 잊은 채 밝게 따라 웃고 있다.




"이 아이가 큰딸 미숙이야. 애가 둘씩이나 혹 붙히고 다니는 놈이지.


얜 지숙이고 아직 학생인데 제법 의젓해 보이지않나?"


"이 미숙이에요. 골프 멋지던데요." 큰 딸이 상냥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며 인사한다.


"전 지숙이에요. 골프 초짠데 잘쳤죠?" 


"가족인줄 몰랐어요. 가족 모임에 초대될줄도 몰랐구요. 정말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호호, 우리가 뭐 대단한 사람들인가요?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똑같은 가족일 뿐인걸요." 미숙은 겸손하게 말했다.


"가족 모임에 타인이 낀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죠.


더구나 존경하는 사장님 가족의 틈에 끼인 저로서는 몸둘바를 모를 지경인걸요."


"아닌 것 같은데요?" 막내 지숙이 끼어들며 부추켰다.


"됐다. 인사들 했으면 저녁이나 같이 먹고 들어가자." 


이 사장은 시동을 걸며 운전대를 잡았다. 


나도 모르게 대가족의 틈에 섞여 한 가족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오빠, 뭘 열심히 생각해?" 


나사랑이가 어깨를 흔들 때 까지 나는 미숙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뭐야? 상담좀 해 달라고 왔는데, 내가 오빠 상담해줘야 하는거 아냐?"


사랑이가 짖꿋게 나를 흔들어 놓는다.


"아냐, 니 일 생각하니 혼란스러워서 잠시 상념에 빠진거야."


"나, 어떻해?"


"글쎄다. 가족 문제는 가족만 풀수 있는 법인데, 난 너희 두 사람이 벌이는 사랑싸움의 근본 원인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뻔한거잖아. 그 인간이 바람피고 나도 바람피나 의심스러워하고 지랄떨던거!"


"그렇게 명확한 일이라면 너 혼자 결정해도 될일 아니니?"


"혼자 결정 못한단 말야."


"왜 못해?"


"도장 찍어야 할지 버티고 있다가 웬수를 갚아야 할지 혼란스러워 죽겠단 말야."


"사랑아, 너희 부부 문제는 분명 알 수 없는 원인이 있을꺼야.


여자문제를 복잡하게 만들면서까지 수십명이랑 놀아나는 사람이 어디 흔한 일이니?"


"그러니까 미친 놈이지."


"글쎄다. 원인제공을 누군가는 했을꺼다. 헤어지는 것이 두렵다면 곰곰히 생각해서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할꺼야."


"원인을 찾으면 뭐하게?"


"네가 버릴 수 없는 어떤 미련의 고리가 뭔지 알아야 헤어지든 붙어 살든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테니까."


"확 도장 찍고 싶다니까."


"그럼 끝났네. 얼른 집에 가서 도장찍으면 될 일을 뭘 망설이냐?"


"쉽지 않다니까 그러네."


"네 맘속에 꺼림직한 뭔가가 앙금처럼 남아있으니까 도장 찍기를 꺼리는거야."


"오빠도 결국 남자다 이거지?" 사랑이는 씩씩 콧바람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백한 일인데도 나랑 상의해야 직성이 풀린다면 분명 너희들 문제는 너희 스스로에게 해답이 있는 상태일꺼야. 네가 도장 찍고 왔다면 너를 위해 위로할 말들을 찾아 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관섭할 어떤 이유도 없지않겠니?"


"뭐야? 오빤 내가 이혼하는걸 바라는거야?"


"부부 문제의 진실은 당사자만 알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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