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34장

본문

감기 - 41 개미의 날개 28






어차피 그녀 정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간에 자신만의 


인맥 정도는 충분히 사내에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타락한 인간이 마지


막으로 의지하는 그물의 한 부분으로 쓰이기 위해 부장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


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만 충실히 하면 될 것 같은 이 좁은 


회사안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편가르기식 실랑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입


안 가득 머금고 있는 담배 연기와 함께 씁쓸한 맛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 또한 그랬고, 그


녀의 입과 귀가 되어주는 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선택이 아닌 강요를 받으며 이곳에서 생


존을 보장받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연약한 개미들의 비명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내


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분을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도 느


꼈던가 보다. 그저 책으로만 읽었던 그 말이 그렇게 현실적으로 와닿을 수가 없었다. 




"큭큭.. "




본사 옥상을 지나가는 매서운 겨울 바람사이로 내 입밖으로 세어나온 한 조각의 차가운 


비소가 흘러가고 있었다. 




"왜요? "


"갑자기 웃기는군요. "




멍하나 맞은 편 건물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는 조금전 내 웃음에 대한 불쾌함과 호기심이 반씩 섞여있는 듯한 느낌이었


다. 딱히 정의내릴 수 없는 기분에 튀어나온 웃음의 파편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망설


이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녀의 시선을 피해 이른 아침 개미처럼 움직이고 있는 수 많은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장님께서 쓰임세에 따라 사람을 곁에 두시는 것.. 그리고 저 또한 높으신 분들의 목적


에 쓰일려고 들어온 일회용 과장이라는 게 왠지 우숩군요.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모든 것


이 그저 이 회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다 버릴 작은 나사 조각도 되지 않는 다는 것


이 말입니다. "




자조섞인 내 말에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며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


작하는 도시의 먼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의 잘 정리된 머리카락이 세찬 바람을 따라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또 다시 지금 이 순간이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씩 상


대방을 공격하고 방어할 때 마다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마치 지금 우리 둘사이의 게


임의 룰인 것 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다음 그녀의 공격에 시선을 피할 사람은 아마도 내


가 될 것이다. 그런 기대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잠시간의 탐색전인 듯 그녀가 지금 대화에는 별의미없는 질문을 해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다음 질문을 위한 포석이 될 거라 짐작되었다. 내가 그 질


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는 동안, 그녀는 다음 공격의 질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벌고 있


었다. 이런 때일수록 상대방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되받아치는 것이 대화에선 중요했다. 




"제가 언제 알게 된 것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경영진이 사내의 위험


요소를 해결할 목적으로 절 바둑판의 사석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경영진


들 중에는 실장님도 포함되는 것이구요. " 


"전.. "




내 말이 끝나자 말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하려 하다가 이내 입술을 굳


게 다물었다. 조금전까지 두꺼운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찡그린 듯한 


묘한 감정의 흔적이 베여 있다 곧 사라졌다. 그 찰라같은 변화는 지금 나와 그녀의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날선 대화의 골을 피하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겐 그 모든 


것이 의미없이 느껴졌다. 어차피 그녀 또한 이 회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경영진들 중에 


한 명이고, 한 인간으로써 내가 아닌 쓸모있는 부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일 


뿐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빈 종이컵에 다시 담배 필터를 비벼 끄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기분이 들어 더이상 이곳에 있


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를 스쳐 지나가고 있을 때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작은 입술에서 그 만큼 작은 목소리가 세어나았다. 그리고 그 목소


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아니에요. " 




무엇이 아니라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때 그녀는 내 무언


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돌린채 그대로 서있기만 했다. 조금전 하다가 만 


대답에 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은 그런 경영진과 다르다는 뜻이었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지나가는 겨울 바람에 실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면접때 그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




그 말과 함께 입사 3차 면접에서 만난 그녀가 내게 했던 질문이 생각났다. "중간 관리직으


로써 과장에게 필요한 덕목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난 그 당시 고심


하고 있던 내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했었다. 동해기획이라는 거대한 기계속에서 


한순간에 떨어져 나와 버려졌던 기억과 높은 하늘을 향해 날아갈 것 같았던 내 자만의 날


개가 꺽여진 후 느껴야만 했더 지독한 소외감들에 대한 대답을 그녀에게 했었다. 




"사측과 사원을 이어주는 중간관리직에게 있어 인간관계는 목적이 아닌 도구로 물화시켜


서는 안 되고, 그 이면에는 신뢰가 반드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었지요. " 


"전 선 팀장의 그 답변이 무척 좋았어요. "


"단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조금 흉내내 본 말 뿐이었습니다. "


"아니에요. "




또 한번 그 말이 되풀이 되자 그녀의 중의적인 대화법에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그녀의 곁으로 걸어가며 주머니에서 또 한 개피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낡고 오래된 


지포 라이터가 경쾌한 금속성을 내며 세찬 바람속에서도 푸른 불꽃을 만들어내 담배에 흰 


연기의 자취를 만들어 주었다. 




"그때 선 팀장의 표정과 목소리는 단지 말뿐인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


"광고인으로 단련된 가식일 뿐이었습니다. "


"아뇨. 적어도 선 팀장 스스로 그 문제를 오랫동안 고심한 흔적을 제가 느꼈었다고 한다면 


우수을까요? "




묘한 대화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그녀가 작고 여린 손으로 답배갑을 열어 입에 물


었다. 그 모습에 습관적인 행동으로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그녀의 고운 입술에 


물려있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한동안 내 손에 쥐어진 지포 라이터를 바라보던 그녀


가 건너편 건물을 촛점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조금전 끊어진 대화를 잇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때부터 선 팀장에게 기대라는 것을 가지게 됐던 것 같아요. 적당하게 쓰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더라도 손쉽게 그 사람을 대신하는 다른 사람을 구해서 잊혀지고.. 그런 


물건같은 존재는 제 남편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




뿌연 스모그 사이로 금빛의 빛줄기를 흘리는 태양이 높게 솟아있는 건물들 사이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 광경을 겨울 바람에 잔뜩 흐트러진 머릿결을 의미없는 손놀림으로 정


리하며 바라보던 그녀가 작은 입술사이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선 팀장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얼마전 지원팀 김유진씨 일을 전


해듣고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지요. 선 팀장이라면 그들과 다를 거라고 말이예요. "




그 놈의 기획서는 도대체 귀에 안 들어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그 


이야기를 하는데 이젠 놀랍다는 느낌보단 지겹다는 생각이 더 앞서고 있다. 어차피 내 손


을 떠난 것이라면 더이상 나와 연관짓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저도 사람을 물건으로 보는 건 원치 않아요. 그래서 선 팀장에게 기대하는 게 커요. 아직


은 선 팀장이 본사에서 이렇다할 위치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 


건물안에서 선 팀장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


"의외군요. "


"그런가요? "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이 도시를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자


유로울 수 있을려면, 그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 말과 행동


은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나사 조각의 부질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씁쓸한 


기분에 고개를 돌려 도시의 먼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내게 한동안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다 이내 사라졌다. 새벽의 기운이 어느 정도 있을 때 옥상에 올라왔지만, 이


젠 완전한 아침의 햇살이 건물 옥상 전체를 채워주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 체온을 


잃어가던 육체에 한줄기 따스함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와 옥상에서 헤어진 후 사무실에서 오전 미팅에 들어갔다. 사무실 한 구석을 차지하


고 있는 긴 회의탁자에 앉았을 때, 향긋한 홍차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


졌다. 노트북 속의 몇 가지 파일을 보고 있던 내가 고개를 들어보니 몇 개의 종이컵을 들


고 있는 어린 백조가 희미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팀장님. 이거 드시고 하세요. "


"곧 대리를 달 건데.. 이제부터 김 대리한테 말을 높일게요. 그리고 홍차 고마워요. "


"뭐, 말 놓으셔도 되요. 예전처럼 큰소리로 화를 내도 되구요. 큭큭. "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나 봐요? "


"그럼요. "




그때 김 대리와의 대화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한 여직원이 뜨거운 김을 내고 있는 홍차


를 한 모금 마신 후 한마디를 던졌다. 




"언니 난 커피 마시고 싶은데.. "


"주는 대로 마셔. 이것아. "


"자자.. 그럼 회의 시작합시다. 먼저 김 대리가 워크 스케줄 확인해줘요. "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여직원들을 데리고 자칫 부산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추스렸다. 간간


히 뜨거운 차를 마시는 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김 대리가 자신의 노트북을 


바라보며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기획실에서 내려온 안에 의해, POP와 신문광고 각 3종은 28일까지, 그리고 메인 포스터


는 이번주 24일로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POP는 한혜진과 안영미, 신문광고 


디자인은 백영주와 조영선, 카피는 주선혜, 포스터 디자인은 제가 하고 있습니다. 시안은 


모두 도출된 상태기 때문에 현재 수정작업 중이구요. 아마도 예상 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김 대리의 간략한 설명을 들으며 노트북안에 워크 폴더에 있는 여러 파일들을 보며 한가


지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오래전 동해기획 CR팀에 있을 때 자주하던 일이기 


때문에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여직원들은 실제 디자인 작


업과 조금 거리가 있는 일들만 하던 이들이라서 실무와 차이가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


고 있는게 다소 흠이라고 할까. 




"우선 POP부터 짚고 넘어가죠. 우리가 만들고 있는 POP는 마라톤 대회의 출발선과 대회


코스의 일정 구간마다 식수대와 함께 설치될 것을 만드는 것인데 지금 상태로 현장에 설


치하면 문제가 생겨요. "




자기들이 만들고 있는 작업물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하자, 나에게 감정이 있는 한


혜진은 곱지 않은 눈으로 노트북을 응시하고 있고, 나이가 어린 안영미는 볼멘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거죠? "


"출발선에 설치할 POP의 경우에는 충분한 공간이 주어진 곳에 세워 놓을 거니까 문제가 


안 되지만, 식수대에 설치할 POP의 경우 힘들게 뛰어온 대회 참가자들이 한꺼번에 좁은 


식수대에 몰릴 때는 이 POP의 넓은 면적이 그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어요. "


"하지만 이번 대회는 그룹 PR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로고는 반드시 들어가야.. "


"어차피 그룹을 홍보하는 것은 이 캠페인을 지속하면서 반복적으로 노출이 될 거예요. 작


은 것에 큰 의미를 두다가 자칫 참가자들이 엉켜서 안전 사고라도 난다면 그만큼 그룹 이


미지가 손상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죠. "




내가 지적한 것에 몇 가지 생각난 것이 있는지 노트북에 메모를 하던 안영미가 내게 고개


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 옆에서 표정없이 자리만 지


키고 있는 한혜진은 어차피 기대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다음 작업인 신문광고로 넘어가기


로 했다. 




"광고를 집행할 신문들은 결정됐습니까? "


"그건 기획실에서 각 신문사와 개별 협의중이라는 답변이 왔습니다. "




김 대리의 짧은 대답에 한동안 회의용 탁자를 손톱끝으로 두들기며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


했다. 광고 집행과 노출계획이 정확하게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광고를 먼저 완성하는 것


은 다소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컨셉이 그룹의 주고객층인 삼 사십대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주지할 필요


가 있을 것 같군요. 최대한의 수식없이 필요한 정보만을 전달할 수 있는 심플함이 조금 부


족해요. 지금 이대로 사용한다면 메인 타겟에게 외면받기 쉽상이예요. "




노트북과 함께 가져온 서류에서 여러 장을 빼어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그들에게 설명


하기 시작했다. 




"이 수 십장의 종이를 신문이라 생각해 봐요. 50면이 넘게 구성되어 있는 일간지에서 우


리가 집행한 광고를 단 5초 이상이라도 읽어 줄 구독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 건지. "


"그렇기 때문에 반복 노출하는 게 기본 아닌가요? "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 너무 많은 메세지를 삽입하는 것은 노출이 반복될 수록 정보를 


보다 많이 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문속의 수 많은 광고중에 하나로 


묻혀버릴 가능성이 더 커요. "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탁자에 두들겨 정리하며 조금전 설명을 계속 이었다. 




"신문안의 무수한 활자들이 쏟아내는 정보들에서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단 한번 그들의 시선를 끌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요. 지금 이 이미지 말고 다


른 걸 구해보도록 하고, 메인 카피와 대회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빼고 나머진 다 날려 버


려요. " 




의기소침해 있는 여직원들을 다독거려줄 필요가 있어 잠시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홍차를 


마신 후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디자인 지원팀이라는 우리 팀의 역활은 기획실에서 내려온 안을 아웃소싱하기 전


에 디자인적으로 검토하고 효과적인 결과물을 도출하는 역활이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런 


시간조차 없다는 것을 감안해야 해요. 여러분들이 부족한 것은 제가 채워줄 수 있으니 가


급적 빠른 시간안에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으면 합니다. "


"전요? "


"응? "


"포스터는 별 문제 없냐구요. "




몇 가지 사항을 더 언급한 후 미팅을 정리하고 있는 나에게 김 대리가 고양이 같은 눈빛으


로 날 쳐다보며 물어왔다. 아마도 지금까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어떤 지적을 받으면 


그걸 받아칠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도도한 고양이의 얼굴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듯이 가


득한 자만심을 읽은 나는 정공법으로 공격하기 보단 멀리 도망가서 허탈해 하는 그녀의 


얼굴 표정이 더 보고 싶어졌다. 




"좋던데요? "


"아니, 팀장님. 언니만 너무 감싸고 도시는 거 아니예요? "


"그러게요. 우리 껀 전부 다시 하라고 하시더니.. "




김 대리만 별 문제 없이 넘어간다는 식의 내 말에 발끈하는 여직원들 사이에는 역시나 자


신의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간 고양이가 한쪽 입술꼬리를 한껏 올리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


고 있었다. 나 또한 한쪽 입술끝을 끌어올리며,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가 한껏 


몸을 웅크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원래 미인에게는 약합니다. 특히나.. "


"참네. 말도 안돼! "


"팀장님이랑 언니 정말 사귀는 거 아니예요? "


"며칠 전부터 이상하더라니.. "


"특히나.. 그 다음에 뭐예요? 말 끊지 말고 똑바로 하세요. "




살짝 웃고 있는 내 얼굴 표정에서 뭔가를 느낀 듯 더욱 앙칼지게 말하는 그녀의 봉긋한 가


슴을 지그시 바라보며 노트북과 서류를 정리한 후 일어났다. 




"특히나 가슴 작은 여자에겐.."


"어머! "


"지금 그 말씀 성희롱이예요. 회사에서 짤리고 싶어요? "




내가 한 장난을 김 대리가 받아주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어차피 정도 안 가는 이 놈의 


회사, 짤리면 짤리는 대로 다른 곳에 가면 된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녀들의 말이 귀속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내 예상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화를 내며 말하기 시작


했지만, 그녀의 눈꼬리는 결코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 내 가슴 작다! 가슴 작은 거 팀장님이 보태준 거라도 있어요? "


"안 그래도 어제 김 대리 덕분에 사내에 변태라고 소문났을 건데 짤려도 상관없어요. "


"어머, 어제 언니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변태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


"당사자한테 직접 들어보시던가요.. 자, 이제 일합시다. "




나와 김 대리 사이를 의심하는 여직원들 때문에 어수선해진 회의 자리를 벗어나 내 자리


에 돌아와 밀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사내의 각부서에서 날아온 전자 서류를 하나씩 확


인하며 일을 하고 있을 때, 서로 메신져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파티션 넘어로 킥킥거리


는 여직원들의 웃음소리가 쉼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방금 김 대리에게 한 진한 농담은 서


로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필요에 의해 한 것이라 그들이 내 욕을 어떻게 하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있게 이해준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동안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끊어지더니 이윽고 딸각거리는 키보드와 마우스 움직이는 


소리만이 조용한 사무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오래전 동해기획에서 늘 느꼈던 그 분


위기가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함께 들었다. 잠시 담배를 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모니터 한 구석에 깜빡거리는 창이 생성되었다. 사내 메신져에 누군가와 


연결되었다는 표시였다. 일을 할 때는 의식적으로 보지 않는 모니터 한 구석의 시계를 바


라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마도 이 메신져 창을 열면 누가 어떤 말을 할


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변태야 ㅋㅋ ]




내 예상보다 강한 공격에 나 또한 비슷한 수위로 받아쳤다. 




[왜? 뽕브라. ]


[죽을래? ]


[뭐 서로 맞먹는 사이끼리.. ]


[웃기셔. ]


[배고프다고? 그만하고 밥먹으러 가죠. ]




한동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다, 나 또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


다. 안 그래도 난 새벽까지 몸을 축내다가 겨우 출근했던 몸이 아니었던가. 오늘 점심은 


아무래도 뜨끈한 설렁탕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다음 메신져를 기다렸지


만, 그녀와 연결된 메신져 창은 조금전 내가 전송한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언가 


망설이고 있는 그녀를 위해 짧막한 말을 전달했다. 




[왜? 편하게 말해요. 점심값 없어요? ]


[참네. 내가 숙자예요? ]


[그럼? ]




조금씩 말을 높여주는 내 말투 때문이었을까? 한참동안의 침묵끝에 그녀가 조심스러운 


글자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팀장님.. ]


[예.]


[저 점심때 늦게 오면 안 될까요? ]


[그렇게 해요. 아주 늦을 것 같으면 나한테 전화주고 바로 퇴근하세요. 내가 알아서 할께


요. ]


[아니, 팀장이라는 사람이 회사 나갔다가 늦게 온다는데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아요? ]




이 사람은 발끈하기만 하면 원래 말투로 돌아오는 것 같다. 파티션 넘어 보이지 않는 그녀


의 얼굴 표정이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되자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


다. 어차피 그녀도 예전으로 돌아간 상태라 나 또한 편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믿는다고 했잖아. 이유를 들을 필요조차 없어. 믿는다는 건 모든 걸 의지하고 맡긴다는 


뜻이야. 반쯤 믿거나 어설프게 믿거나, 나한테 그런 건 없어. 믿으면 그걸로 끝이야. 퇴근 


준비하고 점심때 나가. ]


[오빠가 출판사에 가야 한다고 문자가 왔어요. 다음 번역일 때문에 제가 옆에서 도와줘야 


할 거 같아요. 상대방은 수화를 모르니까요. ]


[걱정말고 오빠 도와줘. 조금있다가 부를께. ]


[고마워요. ^^ ]




그녀의 메신져를 끝으로 모니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여직원


들은 복도를 바라보며 언제든지 뛰어갈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고파서 눈이 붉게 


물들어 있는 육식토끼들을 바라보며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지었다.




"오전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식사 맛있게 많이 드시고 오후에 최대한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김 대리는 귀찮더라도 점심 드신 후 외주 확인하도록 하세요. 


늦으면 현장에서 퇴근하도록 하구요. "


"예, 팀장님. " 




외근준비를 하고 사무실을 나가던 그녀가 여직원들과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


나 그녀의 손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손으로 날 살짝 가르킨 후 마치 기침을 하듯 


주먹쥔 손을 코에 가져간 그녀의 행동에 난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짧


은 수화는 "당신을 좋아해요"라는 뜻이었다. 처음으로 수화를 가르쳐 준 여인이 수줍게 웃


으며 내게 한 그 무언의 고백이 오랜 시간의 벽을 넘어 또 다시 되풀이 되고 있었다. 숨이 


막혀 왔다. 머릿속이 뜨거워지고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녀의 여린 가슴에 고개


를 묻고 따뜻하고 진한 체향을 맡고 싶었다. 




"팀장님은 식사 안 하세요? "




내 대답을 기대한다는 듯이 짖궂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나 또한 무언의 


메세지를 보냈다. 마치 목이 아프다는 듯이 오른손의 날을 세워 목을 두 번 두들긴 후 파


티션에 몸을 숨겼다. 내 수화를 알아 본 그녀의 터지는 웃음소리가 사무실에 가득 울려 퍼


졌다. 




"크핫! 킥킥킥.. "




내가 그녀에게 한 수화의 뜻은 "안보여"였다. 수화를 모르는 오리들은 마치 감기게 걸린 


것 같은 김 대리와, 목이 뻐근한 팀장의 평범한 행동으로 보는지 아무도 이 미묘한 언어 


유희에 신경쓰는 이들이 없었다. 




"팀장님 저 그럼 다녀올께요. "


"늦으면 알아서 퇴근해요. "




파티션 넘어로 고개조차 들지 않고 손만 흔든 내 모습에 또 다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가 사라진 후 한참후에 점심을 먹으러 엘레베이터를 탄 내 주머니에 문자 도착 


알림음이 울려왔다. 유경이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열어본 액정의 이름은 "백조"였다.




[안 보이긴 뭐가 안 보여요? ㅋㅋㅋㅋ 겁쟁이 팀장님 ]




살짝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1층에 도착한 나는, 짧은 내용의 문자를 전송한 후 뜨거운 


국물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아 건물밖으로 걸어갔다. 




[이봐. 난 결혼할 소중한 여자가 있어! ]




문자를 보낸 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기도 전에 또 다시 울리는 핸드폰 문자 알림음. 여자


들이 문자 메세지 보내는 능력은 남자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빠르기다. 




[누가 뭐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




그녀가 보낸 마지막 문자 메세지를 보며, 이 도시 어딘가에서 큰 소리로 웃고 있을 화려한 


백조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 어딘가에 내게 처음 수화를 가르쳐 주


었던 그녀 또한 나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핸드폰과 함께 주머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오래된 지포 라이터가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19금]레드썬 사이트는 성인컨텐츠가 합법인 미주,일본,호주,유럽 등 한글 사용자들을 위한 성인 전용서비스이며 미성년자의 출입을 금지합니다. 사이트는의 자료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작권,초상권에 위반되는 자료가 있다면 신고게시판을 이용해 주세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130건 6 페이지    AD: 비아그라 최음제 쇼핑몰   | 섹파 만나러 가기   |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