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33장

본문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일이 바빠 최근 글을 쓰는 것이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글을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감기가 40편이나 되었군요. 감기 만큼은 느리더라도 연재중단은 없습니다. 










감기 - 40 개미의 날개 27




오피스텔의 창밖으로 들려오던 도시의 소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하게 들려오


다 완전한 정적에 휩싸인 시간. 좁은 내 침실의 침대에는 그것과 별개의 소성이 끊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둥켜안고 있는 두 팔 사이에는 뜨겁고 끈적이는 촉감과 함께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음을 깨달게 해준다. 


고통과 쾌감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마치 새하얀 김이라도 서릴 듯이 내뱉어진 뜨거운 


신음을 힘겹에 열려진 입술로 들여 마신다. 




"하아.. "




새벽의 도시를 지켜주는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오피스텔안에 스며들어 오고, 누구의 


입에서 세어나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진한 한숨소리를 비쳐주고 있다. 온 몸의 힘을 


억지로 짜낸 듯한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는 내 가슴위로 나만큼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


진 그녀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린다. 부드러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내 얼굴로, 내 


목으로, 그리고 내 가슴으로 감싸듯이 흘러내리고 땀에 젖다 못해 물이 흐르는 듯한 


그녀의 두 손이 내 얼굴을 살며시 만져오기 시작했다. 




"후우.. 이젠 그만 자자. "


"왜? 자기 힘들어? "


"도대체 지금 몇 번째야? 잠 좀 자자. "




내 몸을 감싼채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를 한 손으로 정리하며 


땀에 젖은 내 턱끝을 가볍게 깨물어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아이 가질 수 있겠어? 좀 쉬었으니까 다시 해야지? 힘 내봐. " 


"이게 무슨 노가다야? 쉬웠으니까 다시 하게. 잠 좀 자자. 제발.. 너도 나도 출근해야 


하잖아. 지금 정말 죽겠어. "




내 턱과 목덜미를 깨물고 있던 그녀가 두 팔로 침대를 지탱하고 상체를 일으키기 시작


했다. 




"나는? 난 안 피곤한 줄 알아?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를 정말 몰라? "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녀와 이런 시간


을 가지는 것이 즐겁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지만, 오피스텔에 들어오자 말자 단 한 순


간의 쉬는 시간도 없이 끝간데 없이 이어진 열락의 흔적에 온 몸의 피가 송도리채 빠


져나가는 듯한 나른함을 느끼고 있었다. 좋은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아무리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향기도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으면 무감각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까. 점점 무디어져 가는 몸과 마음에 하룻동안 회사에서 쌓여있던 피로감까지 겹쳐 두 


눈꺼풀의 무게를 바위처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무심한 내 말에 토라진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세어 나오고 말았다. 




"후우.. "




물먹은 솜처럼 후들거리는 두 팔에 억지로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킨 나는 아직도 고개


를 숙인 채 내 가슴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끌어 안았다. 그녀의 


이마에 젖은 채 들어 붙어 있는 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그녀의 가슴과 등에 흐르고 


있는 땀을 정리해주는 동안 가만히 내게 몸을 맡기고 있는 그녀의 뺨을 잡고 내 입술


에 가져가기 시작했다. 뜨거웠던 열기 만큼이나 바싹 메말라있는 그녀의 입술을 잠시 


적셔주자 그녀가 내 가슴에 파고들어 오기 시작한다. 




"경아. "


"왜! "




세침한 소녀처럼 토라진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만들었다. 




"우리 천천히 조금씩 그렇게.. 응? "


"난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그래서 얼마나 불안한지 알아? "


"알아. 경이가 왜 그러는지. 하지만 이렇게 서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아이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경이가 누구보다 건강하게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는데. "


"그래도.. "


"조급해 하지 말고, 나한텐 아이보다 경이가 더 중요해. "




내 가슴에 귀를 가져다댄 채 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사실.. 나도 잠와. "




끝날것 같지 않던 야근끝에 드디어 쉴 수 있게 된 기분처럼, 그녀의 그 말에 구원받은 


내 두 팔에 힘이 스스륵 빠지며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게 만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그녀가 내 몸위에 자신을 실은 채 따라 눕혀진다. 그러나 드디어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뜨겁고 봉긋한 아랫배에 깔려있던 한 부분에 눈치없이 


혈액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내 몸위에 자신의 체중을 모두 싣고 있던 그녀


가 모를 수가 없었다. 




"자기야.. "




아직도 내 가슴위에서 내 심장소리를 듣고 있는 그녀의 입술이 열리며 흠뻑 젖은 목소


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달콤한 유혹도, 지금 내 몸을 지배하고 있는 수면


욕을 결코 이겨낼 수는 없다. 그리고 간신히 불을 끈 그녀의 가슴이 다시 뜨겁게 타오


를까봐 난 솔직히 겁나기까지 했다. 정말 한 번만 더 했다가는 회사에 출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은 작은 불씨일 때 확실히 꺼야 했다.




"신경꺼. "


"큭큭.. 소심하기는. 잘 자. "


"경이도.. "




일어나야 할 시간을 채 몇 시간도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 또한 나만큼 피곤


했던지 내 가슴위에 올려진 그녀의 세근거리는 숨소리가 마치 오래전 기억의 자장가


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숨소리에 내 호홉을 맞춰갈수록 점점 깊은 수면 


아래로 빠져들 수 있었다. 




하늘색 커튼이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고 있는 작은 병실안에 앙상하게 뼈만 남


은 어머니가 힘겨운 숨을 몰아 쉬고 계셨다. 눈을 뜨고 계시는 것도 이제 힘에 부치신


지, 나와 마주치고 계시는 엄마의 눈동자는 점점 메말라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손에 


쥐어진 엄마의 메마른 손가락은 아직도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체온이 언제까지나 끊이지 않고 내 손에 남아있기를,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지금 이 


순간처럼 내 손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기를 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더이상 엄마가 버티지 못하실거라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냉


정한 판사의 심판처럼 살아있는 자의 마지막 희망을 송두리채 앗아가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더이상 주사 바늘을 꽂을 수 없을 만큼 앙상해진 엄마의 손을 잡고 눈물만 흘리고 있


는 내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시던 엄마가 힘겨운 입술을 열기 시작했다. 그 작은 목소


리마저 놓칠까 걱정된 내가 엄마의 얼굴가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 이렇게 보니 잘 생겼네.. "


"엄마 닮았잖아.. "




내 말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시던 엄마가 힘겹게 팔을 들어 올리시려 하셨지만, 이미 


기력이 없어진 엄마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상태


였다. 엄마의 손을 잡고 내 뺨에 겹쳐 올렸다. 내 얼굴을 기억하고 싶으신지 내 얼굴 구


석 구석을 만지시던 엄마가 또 한번 메마른 입술을 열고 말을 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껏 들었던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가 되어 버렸다. 




"아빠한테 잘 하고... 연우도 잘 챙겨주고.. "




마치 잠드신 듯한 엄마의 모습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한참 동안의 시간을 요구했


다. 아니, 진실을 알면서도 난 그것을 무시할려고 했다. 난 아직 이렇게 엄마를 떠나보


낼 준비가 다 되지 않았는데, 해드리지 못한 것들, 다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많


이 남았는데 이렇게 엄마를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옆에서 잠드신 엄마를 기다


리면 다시 웃으며 말을 걸어오실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마음과 달리, 냉정한 


내 손은 어느세 침대의 머리맡에 있는 간호사 긴급호출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조용한 병동의 복도를 울리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엄마가 누워 계신 병실


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고개를 돌리며 빨리 엄마를 봐달라고 다급하게 


외칠려고 했었다. 하지만 방금 들어온 간호사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서 무언


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 "




새하얀 간호사복을 온통 피에 젖은 채 걸어오는 간호사는 내게 웃음을 띄우며 말을 


했다. 




"오늘 내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


"제발.. 제발.. "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입안 가득 더러운 역한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내 자신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심장은 이미 터질듯 뛰며 내 가슴을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피에 젖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기 시작했을 때에야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때늦은 외침이 그제서야 닫혀있는 내 입밖으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




그 외침을 끝으로 가슴이 터질것 같아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차가운 병실 바닥


에 잔뜩 웅크린채 이 고통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짐승처럼 울부짖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모든 것이었다. 그때였다. 이젠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엄마의 따쓰한 두 팔이 내 어깨를 감싸오는 것이 아니, 마치 엄마처럼 포근하고 따뜻


한 누군가의 두 팔이 내 어깨를 감싸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두 팔의 주인은 눈


물에 젖은 내 얼굴을 닦아주며 이렇게 속삭였다. 




"울지마.. "




두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속에서 한 손을 들어 익숙한 공간속을 휘저었


다. 그러자 언제나 날 지켜주는 그녀의 진한 체향이 따뜻한 체온과 함께 다가왔다. 그


제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꿈에서 깨어난 것을. 




"유경아.. "




갈라지고 말라버린 내 목구멍에서 탁한 목소리가 세어나왔다. 그리고 반대로 유경은 


물기가 넘치다 못해 흐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울지마. 자기야.. 울지마.. "


"널 잃을까 무섭다. "




그 말은 그녀를 알고 난 후,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 후 매일 아침 느끼는 진심이었


다. 목마른 이가 바닷물을 마신 것 처럼 채워지지 않는 내 영혼의 갈증을 조금씩 채워


주고 있는 그녀를 잃을까봐 낸 매일 아침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조금씩 다가오


는 암표범의 그림자를 느낄 때 마다, 난 내 자신보다 유경을 먼저 걱정해야만 했다. 그


리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더러운 검은색으로 칠해진 내 과거를 말끔하게 지


우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있는 이 행복을 지키고 싶었


다. 유경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내게 남은 마지막 위안이고,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였


기 때문이다. 




한동안 자신의 눈물보다,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던 그녀의 부드러운 혀가 타들어가는 


내 갈증을 적셔주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감겨오는 입술의 느낌과 아직도 거칠게 뛰고 


있는 내 가슴을 쓰다듬는 그녀의 체온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수 년동안 매일 


아침 느꼈던, 이 넓은 도시에 혼자 버려진 듯한 소외감을 더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


는 안도감이 그녀의 체온과 함께 전해져 왔다. 




상처입은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위로를 받듯이 그렇게 그녀의 품에서 두근거리는 심


장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눈치없는 탁상시계의 알람이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달콤한 시간에 빠져있던 우리 둘의 몸이 벌떡 일어나는 것은 도시인으로 살아


가는 이들의 숙명적인 멍에였다. 




"아.. 조금만 더.. "




아직도 젖어버린 분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녀가 내 품에서 아이처럼 칭얼거리기 


시작했지만, 시간이라는 놈은 뜨거울수록 빨리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안심할 수가 없


었다. 




"조금더 있으면 차 막혀. 일어나, 경아. "




일어나지 않을려는 그녀를 억지로 잡아 세우고 함께 욕실에 들어가서 뜨거운 물에 몸


을 맡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다 씻고 내 몸에 비누를 묻혀주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자 아침이라 예민해진 내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눈 돌려. 이건 그런 거 아냐! "


"누가 뭐래! "


"그런데 머리는 안 감아? "


"머리 말릴 시간없어. 자기도 감지 말고.. 빨리 나가자. "


"이게 누구 탓인데. "


"그래서 싫어? "


"아니. "




살짝 흘겨보다가 내 대답에 웃음을 띄우는 그녀가 수건으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한마


디를 하고 욕실을 나간다. 




"질 거 뻔히 알면서 누나한테 대들지? 큭큭.. "




이보다 더 빨리 준비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될 만큼 번개같이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가고 있었지만, 핸드폰 액정의 시계는 이미 오전 6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이 시


간이라면 날 바래다 주기 위해 강북으로 갔다가 다시 강남으로 가야 할 그녀는 지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경아, 오늘은 먼저 출근해. 난 지하철 타고 갈께. "


"안돼. 자기 오늘 아침에도 안 좋았는데.. 걱정되서 안돼! "


"그래도.. "


"내 말 들어!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안심이 안돼. "




아직 화장도 재대로 못한 창백한 얼굴의 그녀가, 첫등교를 시키는 어린 아이를 보는 


엄마처럼 말을 하자 다급한 마음에서도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운전할께. 경이는 그동안 화장 좀 해. "


"괜찮겠어? "




뭘 걱정하는지 눈에 뻔히 써있는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손에서 차키를 뺏


어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내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도 처음으로 조수석에 몸


을 맡기고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살펴본다. 그녀의 차를 운전하며 새벽의 기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푸른색 도심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걱정마. 나 원래 베스트 드라이버야. 몰랐어? "


"참네.. 그건 그렇고 이제 자기도 차가 있어야 할 건데.. "


"글쎄? 결혼할 돈도 좀 빠듯한데.. 지금 오피스텔을 팔기는 좀 그렇고, 중고로 작은 차


를 살까? "


"안돼! "


"왜? 중고도 잘 고르면 좋은데.. "




한동안 손안의 작은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있던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한번 다친 데 만약이라고 또 사고 나면.. 차는 무조건 큰 차로 사! "


"무조건 큰 차로? 그럼 버스살까? "


"지금 장난해? 자기 몸이잖아! "




반만 칠해진 입술로 날 쏘아보는 그녀의 모습이 우수웠지만, 그런 우수운 모습뒤에 말


로써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도 함께. 스틱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움직여 굳어있는 그녀의 팔을 쓰다듬기 시작했


다. 




"미안해. 장난친 거야. 경이 말대로 차 산다면 꼭 큰 차로 살께. "


"다른 건 몰라도.. 제발 그런 걸로 장난 좀 치지마. "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




한동안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있는 내 손길을 느끼던 그녀가, 어깨에서 아래로 내려가


는 내 팔을 힘껏 치더니 눈을 흘겨왔다. 




"쓸 때 없이 또 차안에서 이러지 말고 라디오나 틀어봐. "


"큭큭.. "




잠시 앞차와의 간격을 본 후에 몸을 숙여 라디오 버튼을 누르자, 고운 남자 목소리가 


실내에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 



Anyone can hurt someone they love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줄 수 있지


Hearts will break           가슴이 무너질꺼야


"Cos I made a stupid mistake     내가 바보같은 실수를 했으니까


It can happen to anyone of us    우리중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Say you will forgive me       날 용서한다고 말해줘


Anyone can fail            누구든지 실패할 수 있어


Say you will believe me        날 믿는다고 말해줘


I can"t take, my heart will break    난 감당할 수가 없어, 내 가슴이 무너질꺼야 


"Cos I made a stupid mistake     내가 바보같은 실수를 했으니까


A stupid mistake           바보같은 실수를 




한동안 그 노래를 들으며 조금씩 아침해가 떠오르는 한강을 넘어가고 있을 때, 나른한 


여자 DJ의 목소리가 음악의 뒤이어 들려왔다. 




"사연을 보내주신 Y라는 분의 신청곡, Gareth Gates의 Anyone of Us이었습니다. 헤


어지고 나서야 우리가 사랑을 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게 될 때가 있지요. 그리고 


그런 가슴 아픈 일을 현재 겪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


"저 사람 아직도 못 잊었나 보네. "


"큭큭.. 그러게. 이별에는 다른 사람만나는 게 최고인데.. "


"그럼 자기는 저런 때가 없었어? "




그녀의 말에 끝없이 이어진 도로의 먼 곳을 바라보며 오래전 묻어 두었던 기억의 단편


이 꺼내기 시작했다. 여자를 본능을 위한 대상으로만 바라보기 훨씬 전에,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여인을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방금 들은 노래 가사처럼, 


나 또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도망간 바보같은 남자일테다. 그리고 


그 후회의 흔적들은 지금처럼 차가운 겨울이 되면 내 몸에 걸쳐져 있는 외투처럼 나도 


모르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조금 더 그녀를 생각했어야 한다는 후


회, 그리고 그녀에게 결코 하지 못했던 때늦은 사과에 대한 것들이 유경의 말과 함께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차창밖 먼 곳을 바라보며 운전하고 있는 


내게 유경의 부드러운 팔이 느껴져 왔다. 그리고 그 소리없는 움직임은 말보다 더 많


은 것을 담고 있었다. 




"난.. "




부드러운 눈길로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앞차를 신경쓰


며 고개를 돌렸다. 




"너한테 실수할까봐.. 그게 걱정이야. " 




운전석쪽으로 잠시 몸을 움직인 그녀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 귀에 속삭였


다.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 


"큭큭.. 남자의 고백을 그렇게 말하다니.. 너무한 거 아냐? "


"알아. 자기가 뭘 말하고 싶은지.. 걱정마. 내가 자기를 떠나는 일은 없어. "




어느세 유경과 내가 타고 있는 하얀색 레간자는 아침해가 다 떠오른 회사 근처의 도로


가에 도착해 있었다. 강남으로 다시 가야하는 그녀를 위해 동시에 내려 다시 조수석에 


타자 그 짧은 시간동안 매서운 추위가 차안에 가득 스며들어 왔다. 출근하는 차 안에


서 곱게 화장을 한 그녀가 향긋한 향기를 품기며 추위에 얼어가고 있는 내 품에 안겨


왔다. 정성들여 한 화장이 애써 지워지지 않게 그녀의 이마와 콧등, 부드러운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한 후 몸을 떼어냈다. 




"오늘은 집에 좀 늦게 갈 거 같아. 나 기다리지 말고 집에서 푹 자. 경아. "


"왜? 회식이라도 있어? "


"상진이 좀 만날려고. "


"아.. 큭큭.. 술은 마시지 말구. "


"걱정마. 나도 술은 조심하고 있으니까. 그럼 도착하면 전화줘. 기다릴께. "




운전석에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 그녀를 뒤로 하고 회사의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아직


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힘없이 출근하고 있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이 있는 11층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그 짧은 시간동안 어지러움이 밀려오


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감기가 올 것 같았다. 




탕비실에서 한 잔의 녹차를 만들어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올라왔음에도 담배를 반쯤 피어 갈 때는 녹차의 온기는 이미 겨울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식어버린 녹차와 매케한 담배 연기를 함께 마시며 


조금씩 찾아오는 감기 기운을 몰아내려 하고 있을 때, 또각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


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담배 연기를 힘껏 폐속에 가득 들여 마신 후 


고개를 돌려보니 의외의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 선 팀장. "




정연수 상무보, 기획예산실장으로 입사 간부면접때 한번 본 후에 다시 보지 못했었던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에 담배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난 들고 있던 


담배를 종이컵에 비벼끄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실장님. "


"후훗. 이런 공간에선 그렇게 정례를 하실 필요가 없어요. 저도 업무전에 잠시 머리나 


식힐까 싶어 온 거니까요. " 


"그런가요? "




그녀의 말에 힘을 얻은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보란듯이 불을 붙였다. 그런 내 모습에 


잠시 눈가에 이채를 띄던 그녀가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 고개를 다른쪽으로 돌린


다. 




"피곤해 보이는군요. "


"아직은 익숙한 곳은 아니니까요. "




채 두 시간도 자지 못해 몰려오던 졸음이 차가운 바람과 함께 스며든 담배기운에 조금


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많이 힘들어한다는 말은 들었어요. "


"누구한테 말입니까? "


"여긴 보는 눈도,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아도 말해주는 입도 많은 곳이니까 굳이 누구라


곤 상관없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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