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향기에 취하다 - 10부

본문

부드럽고 달콤한 그녀의 향기에 취하다...




<취중진담>




친근함과 어색함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다. 사물과 사물로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종이 한 장 차이 라는 말이 어울릴법했다. 샛별이 사이에 낀 동안에는 한없이 친근하다가도


어쩌다 단둘이 한 공간에 있을 때면 어색한 기운이 그들을 얼싸안아 버렸다.


그 날밤 이전까지는 그 반대였다.


준석의 마음을 알고 난 후 여울은 그날의 행동과 준석의 흔적들이 눈만 감으면 떠올라 밤잠


까지 설쳐댔다. 


그것은 준석도 마찬가지였다. 


고기맛을 알아버린 스님처럼, 비록 여울의 몸을 탐하거나 입술을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품속


에 느껴졌던 풍만한 여체와 보드라운 볼의 촉감이 떠올라 욕정을 품어야만 했다.


하지만 준석도, 여울도..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한껏 퍼붓고 금세 걷혀지는 감정이기를 바랐


다.




"으휴!! 미쳤어! 미쳤어.... 이 바보.. 바보!“




별안간 주차장에서의 일이 떠오른 여울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을 하고 있다. 몸


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준석이 무안할까 참고 있었던 것도 아


니었다. 자신조차도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 바보스럽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연인 사이도 아닌 언니의 남편과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했던 것이 후회스


러운 것이다.


하지만 여울이 자신에게 더 놀라는 것은 준석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새삼 여성스러워지고 있


다는 점이었다. 옷입는 것 하며 생활의 면면이 그러했다.




“뭐가 미쳐~ 너 요새 이상하다?”


“뭐.. 뭐가?”




샛별이 있는 줄도 까맣게 잊은 채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여울은 아닌 척 해보지만 눈치 빠른


샛별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다. 




“너 남자 생겼지? 맞지?”


“남자? 무..무슨 말도 안돼는... 내가 언제 남자한테 관심 주는 거 봤어?”




“아닌데... 너 요즘 뭔가 있어~ 옷도 여성스럽게 입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수상해”


“수상하긴... 웃겨 증말!!”




당황한 여울은 마침 부쳐내던 전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모면을 하려했다. 등으로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샛별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너 어디가! 이제 잡채 버무려야지!”


“어흐!~ 오줌 좀 싸자!!”




“지지배... 다 큰 게 오줌이 뭐니? 오줌이... 오던 남자도 오만정 떨어져 도망가겠다!”


“아~ 진짜 남자 없다니까!!”




여울이 화장실로 간 사이 음식준비에 여념이 없는 샛별은 볶아내던 갈비찜의 간을 맞추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회식날이기도 했지만 요새 부쩍 잠을 자지 못하고 피곤해하는


준석을 위해 장어구이를 준비한 샛별은 생선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배려해 약간의 갈비찜


도 준비한 것이다.




‘도착할 때 됐나?’




여름이라 해가 긴 탓도 있었지만 유독 해가 저물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는 샛별이다. 허리


뒷춤으로 손을 돌려 두드리던 그녀는 막바지 음식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화장실로 도피한 여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부쩍 거울앞에 서는 시간이


많아진 그녀였지만 여전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서먹하기까지 하다. 잘 바르지 않던 


루즈까지 바른 얼굴이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샛별의 닦달에 못


이겨 바르긴 했지만 당장이라도 휴지로 닦아내고 싶은 심정을 왜 꾹꾹 눌러 참고 있는지 몰


랐다. 




‘아니겠지? 아닐꺼야... 내가 형부를 좋아하는건....’




샛별의 의심때문이기도 했지만 소변이 마려워 자리를 떴던 여울은 소변을 보고 손을 씻으면


서도 그 날 밤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왠만해서는 쉬이 지워질 기억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개를 가로저어도, 마음속으로 자책을 해봐도 안돼는 건 안돼는 것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샛별의 요구가 귀를 파고든다. 자꾸만 샛별의 얼굴


을 보기가 힘든 여울이다.




“여울아! 형부한테 전화해봐... 어디쯤 왔는지”


“언니가 해봐~”




여울이 젖은 손을 흔들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자 샛별은 다시 의심어린 눈빛을 보낸다.


준석도 요새들어 여울을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같은 느낌을 여울에게서까지 느꼈기 


때문이다.




“너 형부랑 싸웠지? 아주... 애들같이... 으이그!”


“싸우긴...”




차라리 싸웠다는 오해가 속 편할 것 같은 여울이다. 




“빨리 해 봐~ 그리고 화해해! 어쩐지 두사람 요즘 사이가 소원하다 했어... 그렇게 친하게 


지내더니... 나만 없으면 냉랭하더라”




샛별은 다시 시선을 돌려 음식준비에 몰두한다. 그렇지만 문득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이유


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그녀였다.




“근데 왜 싸운거야?”




거실의 전화기로 다가가던 여울이 멈칫거리며 순간적으로 식은땀을 흘려낸다. 무슨 이유를 


대야할지 난감한 상황에 쭈뼜거리기만 할 뿐이다.




“별거 아니야... 그냥..”


“그냥 뭐?”




여울을 대신해 잡채를 버무리던 샛별은 손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내려온 귀밑머리를 넘


기며 여울을 바라본다.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이다.




“자.. 자꾸 돼지 같다고 놀리잖아~”


“어머.. 그이가? 그이가 그랬다고?”




순간적으로 핑계를 잘못댔다고 판단한 여울과, 준석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의


아한 샛별의 얼굴은 똑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여울이 당황해 멈칫거리는 사이 샛별은 다시


말을 건넨다.




“정말 형부가 그렇게 놀렸어? 어쩜.. 안 그러던 사람인데....”


“말을 요약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언제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고 했나?”




“그건 그렇고... 이제 너도 많이 변했네! 그런 말에 상처도 받고... 예전엔 그냥 그러려니 하


고 넘어갔잖아!“


“한 두 번은 그냥 넘어갔지.. 계속 그러니까...헤~~~”




“그러니까 살 좀 빼... 여자가 좀 연약해 보이는 맛도 있어야지...”


“언니!! 언니까지 왜 그래~”




사실 살을 빼야할 정도의 여울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날아갈새라 호리호리한 체


형의 샛별의 눈엔 여울이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생각이 든 것이었다.


위기 아닌 위기를 넘긴 여울은 준석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했고 샛별은 여울의 말을


듣고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새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준석에


게 문자메세지로 샛별과의 대화를 간결하게 남겨둔 뒤 음식준비를 돕는다.




파랗게 구름한 점 없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가을만큼 그 그윽함은 담지 못했지만 노


을진 여름 하늘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곧 어둠에 잡아먹힐 아름다움이 아깝기까지 하다.


도착 10분전쯤 걸려온 준석의 전화를 받고 옷을 갈아입은 샛별은 거실에 상을 봐두고 대문


밖으로 나가 준석일행을 맞는다. 여울에게 김실장을 소개시키려는 뜻을 밝히지 않아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그녀였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마도 그 사실을 알렸더라면 여울은 음식준비가 끝나는대로 도망을 쳤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모님 안녕하셨어요?”


“어쩜 날로 그렇게 젊어지세요?”




준석의 차를 선두로 두 대의 차가 뒤따르며 집 앞으로 천천히 바퀴를 세우는 차들이었다.


준석의 차에서 도린이 내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김실장과 정과장은 너스레


를 떨며 요란한 인사를 보낸다.




“시간 딱 맞춰서 오셨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뭘 이런 걸 다 사오셨어요~”




정과장이 내미는 선물꾸러미를 받는 샛별은 도린의 팔을 잡아끌며 집안으로 들어가기 시작


했고 그 뒤로 준석과 두 사내가 따라 들어왔다.




“어머~ 도린씨는 날이 갈수록 예뻐져요... 샘나~”




하얀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도린은 엄청난 맵시를 자랑했다. 자연스러움 보다는 인위적으로 


빚은 것 같은 빈틈없는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손가락에 칠해진 연분홍의 매니큐어와 발가


락에도 비슷한 톤의 색이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편안해보이지만 멋스럽고 고급스러워보이


는 샌들안의 발이 하얗다. 




“사모님도... 참~ 저보다 훨씬 어려보이고 예쁘신데요 뭘요...”




적대적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여우같은 도린은 샛별의 인사말이 그저 진심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도린이었지만 그녀 말이 틀리지 않을 정도의 샛별이다.


키가 상대적으로 조금 작다 뿐이지 친구사이라 해도 믿을만큼의 샛별의 외모도 뒤지지 않았


다. 고급스러움에 우아함까지 겸비한 샛별의 이미지가 부러운 도린이었다.




“그나저나 도린씨! 나한테 좀 혼나야 해요~”


“왜요? 혹시 사장님 때문이라면 저도 사모님한테 부탁 좀 해야겠는걸요?”




“어머! 그럼 우리 서로 오해했던 건가요?”


“후훗! 농담이예요...”




앞장선 두 여자들의 수다를 비웃듯 뒤를 따르는 세명의 남자들도 땅값이며 집값, 그리고 지


리적 요건까지 수다를 떨어낸다. 그리고 그 수다는 집에 들어서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사모님! 저도 도울께요~”




도린이 덮어둔 무릎담요를 치워내며 자리에 일어선다. 하지만 샛별은 억지스레 도린을 다시


자리에 앉히며 손사레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상은 다 차려져 있었고 베란다에서 장


어만 구워 안으로 들이면 될 일이었다.




“다들 앉으세요~ 차린 게 별로 없어서...”


“아유~ 아닙니다. 배 터지겠는데요? 사모님... 근데 오늘은 고긴가요?”




샛별이 며칠동안 고민을 하고 차려낸 상이지만 예의상 말을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실장


이 나서며 너스레를 떨어놓는다. 입을 가린 채 웃는 샛별의 얼굴에서는 만족의 눈빛이 드러


났다.




“오늘은 장어를 한번 해봤어요... 장어 싫어하시는 분 계실까봐 갈비도 준비했으니 입맛대로


드세요“


“장어요? 어이구... 오늘밤을 어떻게 넘겨야 하나?”




투명한 크리스탈 장식 사이로 퍼져 나오는 불빛에 김실장의 머리는 더욱 빛나 보인다. 완전


한 대머리는 아니지만 준석이나 정과장의 머리숱에 비하면 빛나 보일정도의 그였다.


한바탕 김실장의 못말리는 입담에 웃음을 터트린 사람들은 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고 샛별의 


부름에 준석이 베란다로 나간다. 장어를 굽기 위해서였다.


준석은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여울과 샛별, 그리고 김실장의 얼굴을 훔쳐내며 경계


를 하고 있다. 누가 보면 준석이 소개팅을 하는 자리인줄 착각할만큼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


다.




“어우~ 사모님! 정말 맛있습니다... 캬아~ 사모님도 어서 앉으세요”


“네... 많이들 드세요... 도린씨도 많이 들어요~”




샛별의 호의에 눈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질을 하던 도린은 여울을 살핀다. 간단하게 인사만 


건넨 여울의 신체를 눈으로 더듬던 도린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낸다.


비슷할 정도의 키에 늘씬한 도린은 늘씬하진 않지만 볼륨있는 여울의 몸매가 그녀가 보기엔


그저 뚱뚱하게만 보였나보다. 한마디로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다는 뜻인 것이었다.




‘누구지? 사장님 동생? 사모님 언니?’




그저 도린의 관심사는 그녀의 관계여부일 뿐 다른 것은 흥미가 없는 눈초리다. 


뜨거워 보일만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그릇을 쟁반에 받치고 거실로 나오는 샛별과 여


울은 그릇들을 자리에 놔주고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앉는다.




“준석씨~ 오늘은 당신이 봉사 좀 해요... 나도 모처럼 실장님이랑 과장님하고 놀게요”




뒤적여진 음식들을 다시 정리하며 준석에게 곁눈질을 하는 샛별이다. 마른 웃음을 머금고 


대답을 하며 장어를 굽는 준석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숯불이지만 타지 않게 은은할 정도로 


불구멍을 조절하고 소스를 발라 뒤집어 구워내는 뽐이 한 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닌 듯하다.




“아! 실장님! 인사하세요~ 제 동생이예요...”




샛별은 은은한 미소가 번진 얼굴로 김실장에게 여울을 소개한다. 국을 떠먹다 말고 놀란 눈


빛으로 샛별을 쳐다본 여울은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이여울이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샛별의 의중을 파악했는지 고개를 들고 샛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입술을 움찔거


린다. 준석도 장어를 구워내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낱낱이 곁눈질하고 있었다.


김실장은 바지에 손을 비벼 닦는 시늉을 하더니 거침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입안


에 있는 음식들을 한번에 넘겨낸다.




“사모님하고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시네요... 김정권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역시 비교대상은 샛별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는 않는 여울이다. 아


무런 표정도 없는 여울과 다시 식사에 집중을 하는 김실장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실장님! 사모님 동생분하고 잘 해보세요~ 하하하하”


“허! 이사람 참... 앞에 계신 숙녀 민망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정과장이 한술 더 떠 둘의 사이를 붙여주려 하자 김실장은 여울과 샛별


을 바라보며 그의 말에 알 수 없는 대답을 해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말이다.


전혀 마음에 없는 여울의 인상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살려달라는 듯 준석을 바라본다. 짓꿏


은 자리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여울을 바라보던 준석도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어느덧 샛별은 여울과 자리까지 바꿔 앉았다. 주방과 가깝다는 이유에서였지만 누가 봐도


김실장과 더욱 가깝게 해주려는 행동이었다. 말없이 식사를 하던 도린도 그 모습을 보고 흥


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장님 좋겠네요! 사모님! 괜찮은 남자 어디 없어요?”


“어머! 도린씨도... 참~”




도린의 당돌한 말투에 샛별은 약간 당황한 듯 조금은 버벅거리는 말투이다. 불편해 보이는 


여울을 연신 바라보는 준석의 마음도 편할 리 없었다. 처음과는 달리 구워지고 있는 장어도 


부분부분 검게 타 그의 심정이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여울과 몇 번의 눈을 마주치던 준석은 도린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여울과 눈을 맞추다 고개를 돌렸을 때 도린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


린은 대수롭지 않게 금세 눈을 돌렸고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이 들켰을까 걱정스러웠다. 워


낙 눈치가 빠른 그녀였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회식자리를 감싸고 있다. 세명의 여자와 세명의 남자들간의 보이지


는 않지만 불꽃이 튀길 만큼 강한 눈빛들이 허공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소주병과 양주병이 바닥을 서서히 드러내려하고 있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김실장과 정과


장이 거의 다 비워 버린 것이었다.


왠일인지 도린 역시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다만 술을 독약처럼 생각하던 샛별이 김


실장과 정과장의 권유에 이미 홍조를 이뤄내고 있었고 어느새 준석을 대신해 장어를 굽고


있는 여울이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김실장과 정과장의 입담에 커다란 목소리로 웃음을


피워내는 샛별의 모습이 의아스러운 준석이다. 그는 몰랐지만 샛별은 이미 취해있었다.




“여보 괜찮아?”


“네... 괜찮아요~ 실장님이 너무 재밌으셔서...”




취했지만 말은 또박또박 잘하는 샛별이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여울을 챙기는 것은 다름


아닌 도린이었다.




“저기... 여울씨 이리오세요... 그만 구워도 될 것 같은데...”


“어! 그래...처제도 이리와서 한 잔 하라구!”




괜찮다는 여울의 손목을 끌어온 것 역시 도린이었다. 슬슬 샛별의 무리에서 이탈해오는 정


과장 역시 샛별과 김실장의 대화에 낄 자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휴... 역시 실장님 말빨은 따라가지를 못하겠네! 근데 도린씨는 왜 술 안먹어?”


“오늘 실장님 차 운전하기로 했거든요~”




“그럼 가는 길에 나 떨궈주는 거 잊지마~”


“과장님 차는요?”




“내일 와서 가져가야지 뭐.... 그래도 되죠?”


“그럼... 그러지 말고 대리 불러줄게... 아니면 자고 가~ 남는 방 많아”




여울은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혼자만 동떨


어진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자리를 옮겨온 정과장이 자처해 그녀의 말벗을


해주는 것이었다. 우연찮게도 여울이 근무하는 부대출신이었기 때문에 통하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좋으시겠어요? 청초하고 우아한 아내에 귀엽고 글래머러스한 처제까지...”


“도린씨도 참...”




뜬금없는 도린의 말에 준석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평소와는 달리 기분이 많이 가라앉은


듯한 도린이었다. 샛별과 여울을 번가르던 도린은 준석의 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말을 내놓


는다. 준석도 들릴 듯 말 듯 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아! 사장님~ 짝사랑하시던 분은 여전히 진전 없으세요?”


“도.. 도린씨!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건 오해였어요”




시한폭탄 같은 도린의 말들이 준석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해온다.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후훗!”


“정말 아니라니까 그러네....”




어느덧 쌍쌍이 짝을 지어 대화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홍조를 띄다 못해 이젠 불이 


붙은 듯 빨개진 얼굴의 샛별이며, 서서히 불편하고 어색함의 기운을 떨쳐내고 있는 여울, 


그리고 맑은 얼굴로 준석의 마음을 떠보고 있는 도린과는 달리 남자들은 모두 벌개진 얼굴


을 하고 취해가고 있었다.


준석은 여울을 살피는데 여념이 없다. 그나마 정과장과의 대화로 웃음기를 찾아가는 얼굴이


긴 했지만 여울을 향해 날아오는 김실장의 취한 웃음은 준석의 신경을 건드리기에 충분했


다.




“사장님! 이거 드세요!”


“이건...”




“꼬리예요... 후훗! 꼬리가 남자들 스테미너에 그렇게 좋다면서요? 이거 드시고 힘 좀 내세


요... 요즘 통 힘이 없어 보이신다니까...“


“고..고마워요~”




친절하게도 입안에까지 집어넣어주는 도린을 샛별과 여울은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샛별은 


당연했고 여울은 괜한 경계심이 드러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여우같이 행동하는 도린이 그


녀들의 마음에 들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준석은 허허실실 도린의 시중을 즐기는 듯 했다.




에어컨을 틀긴 했지만 답답한 실내공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샛별은 여울을 불러 김실장과


대면을 시키고 그것을 막지 못하면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속편하다는 생각에 담배를 챙겨


대문 밖을 나선다. 가을이 다가오는지 생각보다 선선한 바람이 뜨거운 볼에 닿으며 막힌 가


슴을 시원하게 뚫어줄 듯하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준석이다. 많지는 않지만 유독 맑은 하늘


을 말해주듯 빛나는 별들이 시야에 들어와 넋을 놓게 할 정도였다.




“사장님!”


“어~ 도린씨”




여울이 김실장 곁으로 가기 전부터 보이지 않던 도린 역시 답답해 밖에 나와 있던 것이다.


우연찮게도 샛별과 여울의 눈엔 도린을 따라 나온 것 같이 보일 것이었다. 가뜩이나 도린에


게도 질투심을 가지고 있는 샛별에게 괜한 의심을 받고 싶지 않은 준석은 슬그머니 정원의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긴다. 실내에서도 볼 수 있는 정원의 의자에 앉자 도린도 따라와 건너


편에 자리를 잡는다.


샛별의 얼굴이 준석의 눈에 들어오고 환하게 손으로 인사를 건네준다. 




“사장님 좋으시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저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분이 누군지 알겠는데요? 그리고 그분의 마음도 대충 알겠어요”


“아까부터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화를 내면 더 이상할 것 같아 웃으며 말을 하는 준석의 마음은 이미 새카맣게 타들어가 있


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도린은 눈치를 챈 모양이었던 것이다.




“저요... 사장님 표정만 봐도 알아요~ 사장님도 그러셨잖아요~ ‘이젠 도린씨 얼굴만 봐도 


뭐가 먹고 싶은지, 뭐가 필요한지 알 것 같다‘ 라구요. 저도 똑같아요“


“하하하~ 도린씨 무서운데?”




“사장님, 사모님을 보셔서라도 그러시면 안돼요~ 그냥 마음 접으세요”


“후우~ 역시 도린씨야... 대단하군!!”




준석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하지만 마땅치 않음에 혼자만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거 보세요... 제가 차라리 귀신을 속이라고 했죠?”


“도린씨! 내가 이상해보여?”




취중진담이라고 했던가! 준석은 취한 김에, 그리고 답답한 김에 여울에 대한 말들을 자신도


모르게 도린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웃음 짓고 있는 샛별에게 손동작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여울에 대한 얘기를 이끌어간다.




“그럼요! 이상해보이죠! 앞으로 지켜봐야할 일이지만요~”


“지켜보다니?”




“호기심으로 시작되신 거 같은데... 그거 아세요? 남자보다 여자들은 남자가 ‘사랑해’, ‘좋아


해’ 라고 말을 할 때 쯤이면 푹 빠져 있거나, 아니면 도망친다는 사실이요... 고백을 해야겠


다라고 마음을 먹은 순간 가까이 있다면 상대방도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거죠~ 아무리 숨긴


다 해도 남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구애를 하는 습성이 있거든요“


“... 뭔가 심오하군요”




진심으로 토로하는 도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하게 도린의 말을 이


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쉽게 얘기하면 어쩌면 여울씨도 사장님의 마음을 알았다는 거죠. 그 뜻은 사모님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증거이고요~“


“..........”




“제가 봤을 땐 여울씨는 확실히 사장님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죠?”




준석은 도린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 워낙 눈치가 빠른 도린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들


켰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아까 여울씨가 사장님을 보는 눈빛에서 그렇게 느껴졌어요. 사모님은 알지만 현재 설마 하


는 것 일 테구요“


“...어렵군~ 그치만 도린씨가 생각하고 걱정 하는 것만큼은 아니니 너무 걱정 말아요”




“사장님 정말 뭘 모르시네요... 남자와는 달리 여자들의 심리는 매우 복잡해요. 물론 사람마


다 다르긴 하지만....“


“근데 도린씨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이참에 직업을 바꾸는 게....”




생각보다 진지하게 말을 하는 도린의 말을 막는 준석이었다. 다른 것 보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이 헐벗은 느낌보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유부남에 게다가 아내의 동생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간섭을 하는 것 같은 도린의 말도 기분이 나쁘게 할 만 했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어두워진 도린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렇게 대화를 단절시키는 준석이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도 도린의 말에 의해 더욱 발휘되는 것 같았기 때


문이다.




“사장님 죄송해요.. 건방지게 너무 쉽게 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만 더 얘기할래요”




도린도 자신이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사과를 한다. 하지만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것


도 잊지 않는다.




“사장님께서 이쯤에서 그만 둬야겠다고 느끼시는 순간은 이미 늦은 순간이라는 걸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두 분, 또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말이예요”




준석은 이미 꽁초가 되어버린 담뱃불을 비벼 끄며 알았다는 눈빛을 보낸다. 진심으로 걱정


을 해주는 도린의 조언을 가슴 깊숙이 새겨 넣을 뿐이다. 마지막 그녀가 남긴 말은 준석에


게도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도린씨..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마지막말은 명심할께요”




준석에게 눈을 맞춘 도린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어둠을 드리우던 표정을 다시


바꾼다.




“어흐~ 우리 순진한 사장님... 어쩌다 이런 수렁에 빠지셨을까~ 비밀로 해드리죠!”


“그러게 말이야... 나도 모를일이야....”




준석과 도린의 얘기를 몰래 듣기라도 했듯이 마무리가 되는 순간 집안의 사람들도 서서히 


자리를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소리들과 함께 정원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었다. 배웅을 하기위해 샛별과 여울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이 모습을 비추자 일어서며 치마를 바로 하는 도린은 눈을 찡긋하며 준석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을 받은 준석도 검지손가락을 곧게 펴 입술에 대며 그들만의 비밀을 봉쇄하려 


했다. 재차 고개를 끄덕거린 도린은 김실장이 건네는 자동차 열쇠를 들고 운전석으로 오른


다. 그리고 도린이 운전하는 김실장의 RV차량의 뒷모습이 없어질 때 까지 대문 밖을 바라


보던 세 사람은 다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우리 샛별이 왠일이래? 술도 다마시고~”




“형부! 들어가서 우리끼리 한 잔 더 해요~”




“아웅... 난 도저히 못 버티겠어~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비틀대는 샛별을 부축하고 집으로 들어서는 준석은 샛별이 그랬


듯이 따뜻한 물에 꿀물을 타주고는 여울과 함께 거실을 치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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