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향기에 취하다 - 8부

본문

부드럽고 달콤한 그녀의 향기에 취하다...




<그녀의 전령>




변함없는 준석의 모습이었다.


언니를 아끼고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그윽한 눈, 자상한 배려심.


아침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울은 그 흔적의 주인공이 준석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두운 표정의 여울이다. 먹성 좋던 그녀가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고 있고 주저리 떠들썩하


게 만들던 활기찬 음성은 침묵을 지켜내고 있다.




“너 어디 아퍼?”




단순하고도 작은 변화를 먼저 알아챈 건 다름 아닌 샛별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히 식


사를 이뤄가는 여울이 이상하게 보여 먼저 말을 건넨 그녀였다.


하지만 고개도 들지 않고 고개만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여울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석


도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지 대화에 가세를 한다.




“처제~ 왜 그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걱정스런 눈빛으로 변한 준석을 힐끔 바라 본 여울은 반공기도 비워내지 못하고 수저를 내


려 놓는다.




“나 괜찮아~ 왜 들 그래? 헤헤 맨날 까불다 언니 말대로 안 까부니까 심심하지? 그치?”




여울이 다시 활기를 머금은 말투를 건네자 그제서야 걱정스런 얼굴을 거두는 샛별과 준석이


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린 준석은 다시 국을 입에 떠 넣으며 안심


을 한다.


억지스레 활기찬 척을 한 여울이지만 역시 자신에겐 이 모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


리고 쓸데없는 걱정이나 의심 따윈 스스로 지워낸다. 




‘하긴... 형부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짓을 했겠어...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고 여우같은 언니


도 있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아무리 단순한 성격의 여울이지만 쳐졌던 기분을 한번에 끌어올리기


는 무리였는지 조금씩 다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잔 여울이었다. 


남자들 틈에서 생활을 한 지 벌써 4년이 넘었기에 왠만한 야담이나 남자들의 성적 습성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자신의 속옷에 묻어있던 그 액체는 분명 남자의 정액이었다. 그렇다면 이 집에서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형부인 준석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도 그리고 아침을 먹는 이 시간


도 평온하기만한 그의 표정에서 그 흔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밤새워 생각하고 뒤척이면서 단서라고는 가끔씩 자신의 가슴을 넋 놓고 바라보던 모습 외엔 


발견할 수 없었다. 확신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가슴 때문만이 라면 부대에서나 학교를 다


닐 때 자신의 속옷은 이미 남자의 정액으로 엉망이 됐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이었다. 남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기는......


여러 감정이 겹쳐 나타나는 그녀였다. 불쾌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기분이 좋기도 했다. 


또 겁이 나기도 했다.




“이거라도 마시고 가~”




밤새워 같은 생각만 되풀이 하고도 또 같은 생각에 잠긴 여울의 정신을 들게 한 것은 샛별


의 목소리였다. 투명한 글라스에 담긴 토마토주스를 건네는 샛별은 평소와는 달리 이상한 


여울을 보며 갸우뚱한다. 




“고마워 언니...”


“너 뭐야... 빨리 말해!”




“내가 뭘...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그러네!”


“그래? 아! 너 이번주 금요일에 일찍 들어 올 수 있어?”




샛별의 물음에 여울보다 놀란 얼굴을 하는 준석이었다. 급하게 다시 식탁으로 얼굴을 떨구


기는 했지만 귀는 여울의 대답에 잔뜩 긴장을 하는 중이었다.




“왜? 금요일? 끝나고 바로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울의 긍정적인 대답에 준석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탄식을 뱉어낸다. 잊었으면 하고 있던


비서실 회식의 얘기를 모를 리 없는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식때문만이 아닌 김실장에


게 여울을 소개시키는 자리가 될 것이기에 준석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잘 됐다! 그 날 형부 비서실직원들 우리집에서 회식하기로 했는데 일찍 와서 좀 도


와줘“




남자를 소개시켜주겠다는 말을 하면 일부러 늦게 올까 걱정 된 여울은 속내를 숨기고 그저


음식준비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건네자 흔쾌히 농담까지 건넨다.




“아~ 그럼 우리 취사병 애들 좀 데리고 올까? 걔네 밥 무지 잘하는데....헤헤”




두 자매의 긍정적인 대화가 이뤄질수록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은 다름 아닌 준석이었


다. 뜯어 말리고 싶지만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얘는... 아무튼 금요일에 좀 일찍 와~, 여보! 제가 실장님께 전화 하긴 좀 그러니까 오늘


당신이 얘기 좀 해줘요...“


“그...그러지...”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준석이었다.




“몇 분정도 돼죠? 김실장님.. 도린씨... 정과장님.. 음...”


“비서실만 하면 세 명이지, 아얘 기획/총무부서까지 같이 할까? 그럼 한 스무 명 정도 될텐데....”




아무래도 인원이 많아지면 시선이 분산되어 소개를 주고받고 하기가 힘들어 질 것으로 생각


한 준석의 제안은 샛별의 말 한마디로 묻혀진다.




“나 죽이려고요? 그렇게 많은 사람은 좀 힘들죠~”


“언니! 동생찬스 한 번 써~ 우리 애들 밥 진짜 잘한다니까? 빌려올게~ 후훗!!”




“너도 농담 그만 하고! 그냥 가족같은 분위기로 비서실만 해요~ 오늘 얘기해요. 알았죠?”


“아...알았어... 근데 힘들면 굳이 집에서 안해도.....”




“이이는... 그럼 실장님한테 약속한 건 어쩌구요~ 그냥 할께요.. 너무 걱정마세요”


“그..그래, 그럼~ 하자구!”




평소답지 않은 여울과 비서실 회식의 계획을 얘기하느라 보통 때 보다 아침식사 시간이 길


어지고 있었다. 준석의 진짜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샛별의 제안에 준석은 그저 벌레 씹은 얼


굴을 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준석은 괜한 억울함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입맛이 씁쓸해지고 속이 더부룩해


지는 것 같아 여울과 같이 밥공기를 전부 비워내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을 때였다.


자동차의 경적음이 짧고 경쾌하게 딱 두 번 울려 퍼진다. 여울이 집에 있는 평일이면 어김


없이 들려오는 소리였다. 




“어? 언니! 형부! 나 먼저가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여울을 바라보던 준석은 통유리로 된 베란다를 바라본다. 짙게 얼


룩무늬로 도색이 된 지프차에서 내린 운전병이 담배를 물고 차 바퀴를 살펴보고 있었다. 


곧이어 현관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투박한 군화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대문까지 열고나간 여울을 보자마자 경례를 올려붙이는 운전병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카


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변한 여울이 짧은 거수 경례로 그 인사에 답을 보내준다.




“중대장님 얼굴이... 잠 못 주무셨습니까?” 




유독 푸석해 보이는 여울의 모습이다. 잠을 못자서 이기도 했겠지만 단순히 못잔 것이 아니


라 생각과 고민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운전병인 재용이 너스레를 떨어낸다.




“왜? 그런 거 같이 보여?”




부임한지 몇 주 되지도 않았지만 말주변이 좋은 재용과는 금새 친해질 수 있었던 여울이다.




“예.. 조금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래... 피곤하다~ 피곤해”




누군가에게 가진 고민을 풀어내어 해결을 해가던 스타일의 여울이지만 이번일 만큼은 얘기


를 나눌 사람도 없거니와 털어 놓을수도 없는 입장이다. 또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에 고민이 겹쳐져가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여울에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재용은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가던 방향을 가고 있다.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된 길가엔 목마름에 지친 수풀들이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지쳐보


인다. 




“재용아~ 요즘 사병들 분위기 어떠니?”


“어떤 거 말씀인지 말입니다...”




“그냥... 불만이나~ 건의 사항 같은... 사소한 것도 괜찮고”


“그런 것 없습니다.”




가제는 게 편이라고 했던가! 부대내의 구성원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실질적으로도 부


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사병의 기강과 질서를 잘 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병의 고


충과 불만사항을 잘 헤아려야만 했지만 속 후련하게 말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여울의 운전병인 재용도, 전령을 하는 상현도 말실수 한 번에 사병들의 잘못된 전통이 깨지


고 도태될까 중대장인 여울의 질문에 뭉뚱그려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재용아~ 내가 불편하니?”


“아.. 아닙니다!”




“그럼? 여자라고 깔보는 거니?”


“절대 아닙니다.”




부대와 가까워질수록 여자에서 군인으로 탈바꿈 되어가는 여울이다. 가지고 있던 고민마저


도 머릿속에서 지워진 듯 부대를 운영할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녀석! 조금 더 친해지면 그 때 속 시원히 털어 놓을거니?”




당황한 기운이 여울에게까지 손을 뻣는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


니지만 결국 어색해져버린 분위기는 부대내로 진입해 여울이 차에서 내릴 때 까지 풀리지


않는다.




“재용아, 수고했다!”


“충성!”




여울은 경례를 하는 재용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상황실 내 중대장실로 향한다. 




/충성!... 충성!/




사병부터 부사관들까지 상급자인 여울에게 경례를 하고 여울도 일일이 그들의 인사에 답을


보낸다. 




“중대장님~ 나오셨습니까?”




여울의 등 뒤에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 행정보급관(이하행보관)이 너스레를 떨며 여울을 위


아래로 훑어보고 있다. 군침이 도는지 목젖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행보관님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요?”




행보관의 눈빛이 느끼하고 능글맞게 보이지만 그저 무시하는 여울이다. 전투부대의 특성상


흔치 않은 여자중대장에게 느끼는 일시적인 호기심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가끔 일부러 들


으라는 듯 자신을 향해 성적인 야담을 흘려대는 부사관들의 기강은 잡아야만 했지만 아직은


부대파악이 시급한 여울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은 실정이었다. 부임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일부러 


말을 아끼는 듯 한 간부들의 행동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두고 봐 라! 내 힘으로 꼭 기강을 잡을테니!’ 




여전히 여울의 신체를 위아래로 훑는 행보관을 뒤로하고 중대장실로 들어간다. 


사방이 적들로 뒤덮힌 듯하다. 사병, 부사관, 그리고 같은 장교들마저도 모두 눈에 불을 켜


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듯 비협조적인 분위기였다.


자신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전투모를 벗어 책상위로 올린다. 파란 나일론 천위로 유리


가 깔려있어 모자의 챙이 닿으며 딱딱한 음을 낸다.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쉰 여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하다. 


중대장실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듯 무척 시원한 느낌이다. 반면 시끌한 밖의 분위기는 무척


활기차 벽 하나 사이를 두고 극과 극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자신 혼자만 동떨어진 느낌이 


들고 마음이 약해지지만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르는 여울이었다.




짧으면서도 경쾌한 노크소리와 함께 군대식의 출입법이 들려온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예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라는 말도 그렇다고 여울이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 형식적인 출입법이 끝나자마자 전


령인 상현이 쟁반에 차를 들고 들어와 여울의 책상에 소리 없이 내려놓는다. 




“상현아~”


“병장 정상현!”




“가서 차 한 잔 더 가져와.. 얘기 좀 하자~”


“예~ 알겠습니다.”




오전과업이 시작하려면 한 시간 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월요일임에도 특별히 간부회의


를 생략한 채 전령인 상현에게 길어질듯 한 대화를 암시라도 하듯 차를 준비시킨 여울은 조


용히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따뜻하고 쌉싸름한 녹차의 향기가 코와 목으로 퍼져나가며 답답한 가슴의 응어리까지 씻어


내리는 기분을 느끼던 여울은 다시 들어온 상현과 나란히 앉아 눈을 맞춘다.




“상현이 전역이 얼마나 남았지?”


“5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5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구나! 잘 지내보자!!”




여울이 처음 만난 사람처럼 뜬금없이 악수를 청한다. 


찻잔을 들고 있던 상현은 서둘러 잔을 내려놓으며 여울의 손을 붙잡고 우렁찬 목소리로 누


가 먼저 시작했는지 감동 없는 딱딱한 멘트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병장 정상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 멘트를 한 두 번 접해본 것이 아닌 여울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웃음을 번져낼 만큼 우습


게 들릴 뿐이었다. 거의 모든 군인들이 그러하겠지만 투박하고 거친 상현의 손이 자신의 손


안에서 적당히 힘을 뺀 채 붙들려있다.




“그래.. 무슨 충성을 다 할건데?”




여울은 상현의 손을 잡은 채 놀리듯 되묻는다. 자신이 상급자에게 받았던 질문과 같은 질문


이었다. 그들은 여울에게 성적인 농담을 우회하여 말을 건넨 것이지만 여울은 그저 그 장난


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단순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예?”




당황한 상현의 표정에서 난감함이 드러난다. 여울이 느꼈었던 것 같이 성적인 농담을 걸어


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급작스레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순간이었다. 여울과 맞잡은 상현의 손바닥에서는 긴장과 무


안함의 땀이 베어나오고 서서히 손을 놓아주는 여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낸 상현은 급하게


거둬들이고 있었다.




“상현아~ 앞으로 나와 단 둘이 있을 땐 편안하게 행동해”




여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명령조가 아닌 부탁조의 말투에서 상현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군대이긴 하지만 한 여자가, 연상의 여자가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


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얘기가 오갈수록 자신의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게 된 상현이었다. 단순히 편안하고자


다가왔던 중대장의 호의 깊은 마음을 제멋대로 삼류 로맨스로 이어가려던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지는 그였다.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상현의 생각은 틀어졌다. 웃으며 시작된 대화는 어느순간 심각하기까


지 무겁게 변해버린 것이다. 상현의 나이나 가족관계, 여자친구의 유무같은 가벼운 주제에


서 점점 부대의 얘기로 끌고가는 여울의 화제에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 중대장님은 어땠어?”


“무서우셨습니다. 사병들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 못하시고 그저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 부대


를 운영하셨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사병의 힘이 줄어들수록 간부들의 꼬장은 더 심해지니


말 못 할 불만들이 많이 쌓여있을 겁니다.“




“꼬장이라니?”


“괜히 기강을 잡는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괴롭히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다못해 한.일전


축구에서 졌다고 밤에 빵빠레를 시키고 자신들 편하겠다고 담배 심부름까지 시키는 그런 못


된 명령은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현이 떠뜨리는 말들에 여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말을 아끼던 상현이었지만 한 번 열은 입을 쉬이 닫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중대장님께 이렇게 일일이 말씀드리는 것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무슨 뜻이지?”




“결국 중대장님도 간부신데 저의 말에 괜히 화가 나셔서 사병들에게 안 좋은 생각을 가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상현의 말에 대답을 잇지 못하는 여울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자신


들의 입맛에 맞게 편하게 바꾸려고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일반적인 사회에서도 그러한 관념


은 넘쳐났지만 명령과 복종이 팽배한 군대라는 곳은 더욱 심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찻잔에 남은 차를 입안으로 털어넣은 여울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상현을 바라본다.




“상현아~ 내가 어떤 중대장이 됐으면 좋겠어?”


“예?”




“난 너희들을 괴롭히거나 골탕을 먹이고 싶지 않아. 물론 너희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


어 줄 수도 없겠지...... 하지만 실질적으로 부대를 구성하는 인원 중 가장 많은 사병들이 즐


겁고 행복하게 지내다 전역을 했으면 하거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힘이 필요


해. 너는 짬밥도 되고 군생활도 오래해서 알겠지만 사실 간부들이고 사병들이고 여자중대장


에 대해 비협조적이란걸....“


“중대장님!”




여울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진솔하게 얘기를 해나갔다. 듣고 있는 상현도 전 중대장이나 썩


어 빠진 간부들과는 다른 여울을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이다. 




“내가 여자로 보이니?”


“아..아닙니다”




“먼저 사병들과 친해지고 부대를 잘 이끌어가고 싶은데... 좀 도와주지 않겠니?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음.... 개인면담을 해보시는 것이 어떠신지 말입니다.”




여울이 그것을 생각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언젠간 해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라는 특성상, 그리고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


계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면담?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면담이 효과가 있을까?”


“주제넘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지 말입니다”




여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현의 눈에 눈을 맞춘다.




“중대장님에겐 다른 사람에겐 없는 가장 좋은 무기를 가지고 계십니다. 군인이라는 신분이


기 때문에 여자라는 것을 잊으려하시지만 누가 봐도 여자십니다. 강할땐 강하고 부드러울땐


부드러워야 효과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남자보다는


여자가 행했을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현의 말에 집중을 하느라 그의 말에 호응도 잊은 여울이었다. 마치 준비라도 했던 말처럼


한 번 터져버린 상현의 입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친누나같고, 때론 이모같은 또, 애인 같이 새초롬한 여자로도 다


가왔다가 훈련 할 땐 그 어떤 강한남자보다 강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사병들 뿐만


아니라 간부들까지도 마음이 움직일거라 생각합니다.“


“음..... 누나.. 애인이라....”




“사람이 모여사는 집단인지라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중대장님이 가지고 계신 무기


로 조금씩 바꿔나가실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래... 고맙다.”




상현이 요구하고 바라는 것은 해이해진 기강을 잡는 것이 강한 군기가 아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듣는 여울이었다. 그리고 기계처럼 단숨에 바


꿀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도 한참이나 잘못 되었음을 깨닫는다.




“아! 그리고 수양록을 검사해보시는 것이 어떠신지 말입니다.”


“수양록?”




“부대인원 중 80%정도는 수양록을 씁니다. 자신만의 글이기 때문에 입으로 나오는 말보다 


더 진실되고 자신에게 솔직할 겁니다.“


“하지만 남의 일기를 내가 본다는 게......”




상현은 얘기를 나눌수록 소녀같이 여린 마음을 가진 여울이 귀엽게 느껴진다. 자신과 세 살


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계급상으로는 많은 차이 때문에 멀게만 느껴지던 거리감과 괴리감도


조금씩 좁혀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결코 도도해 보이지는 않는 이미지 였지만 딱딱하고 애교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중대장


이 귀엽게 느껴지는 순간 여자로 보이는 것이었다.




“제가 알기론 수양록은 상급자가 검사를 해도 된다고 알고 있고 그것도 마음에 걸리신다면


훈련나갔을 때 살짝 검사를 하시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나도 훈련을 나가야 하잖아~”




“저는 안 나가지 않습니까~ 제가 일일이 복사해 놓겠습니다.”


“후훗! 이 녀석! 내 편이 되어주는 거니?”




여울은 어느새 굳어졌던 얼굴을 펴고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자신의 편이 생겼다는 즐거움도 좋았고 어려워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준 상현에게 고맙기


도 한 그녀였다.




어느새 대화의 주체가 상현으로 변해 있었다.


선생님에게 훈계를 듣는듯 하기도, 또는 절친한 동네오빠에게 고민을 털어놓듯 하는 여울


은 상현 앞에서 이미 중대장이란 껍데기를 벗어버린 듯하다.


워낙 말을 조리있게 잘하는 상현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의 말에 흠뻑 빠져들어 자신이 가야


할 길과 취해야할 행동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내고 있었다.




‘음... 수양록 검사는 아무래도 천천히 해야 할 것 같으니... 개인 면담부터 시작해 볼까?’




여울의 얼굴이 웃음으로 번져간다. 


아침부터 내내 자신을 누르던 무거운 걱정의 짐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이 느껴져 홀가


분함까지 느껴지는 그녀였다.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것은 따뜻한 마음씨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여울이었다.




“중대장님! 제가 부탁의 말씀 하나만 드려도 될지 말입니다.”


“그래! 얘기해봐~”




이미 모든 걱정이 해소 된 듯 했던 여울에게 상현이 나지막하게 걱정과 부탁의 말을 건넨


다. 여울은 다시 상현의 입에 초점을 맞추고 입술의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원래 군대라는 곳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곳 아닙니까.. 그냥 누나


같이, 애인같이 중대장님이 가지고 계신 특유의 발랄함과 부드러움으로 남자들을 녹여나가


십시오. 분명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고 인기도 많아질 것입니다.“




상현의 얼굴이 진지하다. 거짓을 말하거나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란 걸 눈치 챈 여울이 고


개를 끄덕이며 상현의 말을 머릿속에 되새기고 있었다.


상현은 다시 말을 줄줄이 뱉어낸다.




“잘한 일 있으면 마음껏 칭찬해 주시고 슬픈일이 있으면 안아주시고 아픈일이 있으면 보듬


어줄 줄 아는 그런 분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첫인상과 같이....“




갑자기 자신의 첫인상이 궁금해진 여울이었다.


누군가에게 언젠간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딱히 물어볼 기회가 없었던 여


울은 말이 나온김에 라도 꼭 듣고 싶은 마음이다.




“내 첫인상이 어땠는데?”


“예쁘셨습니다. 군인치고는....”




“너 꼴아박을래?”


“하앗! 노...농담입니다!! 그냥 외모상으로는 저희 사병들끼리 아직도 입에서 입으로 회자 될 


만큼 예쁘시고 다른 한 편으론 날카롭지 않은 명랑만화 주인공의 이미지 덕분에 군생활이 


편해질 것 같다는 사병들도 생길만큼 착한 얼굴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를 나눠 본 결과 착한 얼굴 만큼이나 착하고 여린 마음씨를 가지고 계신 


것 같아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상현이 지금 내 걱정하는거야?”


“예.. 혹시라도 험한 군생활에 가지고 계신 순수함을 잃지는 않으실까... 거친 남자들 사이에


서 상처라도 입지는 않으실까... 그래서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지휘관으로 변해버려 사


병들에게, 또는 그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지는 않으실까 그것이 가장 염려 됩니


다.“


“녀석....”




여울의 마음이 힘없이 으깨지는 두부처럼 한없이 으깨져버린다. 입에 발린 소리라도 단 한


명도 자신에게 이토록 따뜻한 염려를 해 준 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사병들이야 기간만 채우면 전역을 하는 몸이니 저희보다는 먼저 중대장님을 챙기십시


오! 단 이기적이고 못 된 방향이 아닌 여자의 몸과 착한 마음이 퇴색되지 않는 훌륭하고 멋


진 지휘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래... 네 말 꼭 명심하마~”




여울의 심장이 심하게 요동질을 해댄다. 


자신보다 어리고 하급자인 상현에게 들은 말 치고는 가슴 한켠에 박히는 정도가 생각외로 


깊숙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연애조차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여울로서는 심장을 떨리게


하는 상현의 말이 왠지 사랑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게 들릴 뿐이었다.


상현은 들고 들어왔던 쟁반위에 찻잔을 올려 담기 시작한다. 달그락 거리며 투명한 자기의 


울림이 여울의 가슴팍까지 파고들어와 더욱 심한 요동질을 선사한다. 




“제가 너무 주제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야... 고맙다! 이리 와 봐! 동맹 맺은 기념으로 한 번 안아보자!”




잠시 멈칫거리던 상현은 테이블위로 쟁반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여울에게 다가간다.


화장품의 냄새나 향수냄새가 아닌 여자에게 나는 특유의 향긋한 내음이 코에 풍기자 자신


도 모르게 부풀어 오르는 자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멈칫거릴새도 없이 자신의 몸통을 사뿐


히 끌어안는 여울의 손길에 주저없이 몸을 부풀린 자지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최대한 엉덩이를 뒤로 뺀 상현은 여울의 샴푸냄새와 부드러운 여체에 홀려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로 순간을 기억속에 저장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그 자리에서 탐하고 싶은 마음이 상


현의 이성을 뒤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중대장님! 앞으로 많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한 번 믿어 보십쇼!”




그저 아낌없이 많은 말들을 전해준 상현이 고마워 안아보고 싶었던 여울이었다. 하지만 듬


직하고 넓다란 가슴 안으로 자신의 몸이 안겨버리자 온 몸에 맥이 풀리듯 서서히 힘이 빠지


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서둘러 상현의 몸 안에서 빠져나오는 여울이었다.


어느새 호흡도 가빠져 있었고 땀이 흐를 정도로 몸이 후끈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식! 몸 튼튼한데?”




여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저 끈끈한 전우애였으면 했다. 왜 갑자기


상현과 포옹이 하고 싶어졌는지, 그의 몸이 느껴지는 순간 왜 맥이 풀렸는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그것들을 모조리 전우애 또는 동료애로 포장해버린다.


상현이 커다랗게 경례를 올려붙이고 중대장실을 빠져나간 뒤에도 여울은 넋이 나간 사람처


럼 자신이 느꼈던 그 감정을 밝혀내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전과업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전투모를 찾아 눌러쓴 여울은 천천히 중앙현관 앞에 집결하


고 있는 사병들을 바라본다. 자신과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사병들이지만 너무도 어리게만


보인다.


뜨거운 태양이 사정없이 온 부대 곳곳을 비추고 있다.


모자에 달린 대위의 계급장이 그 태양을 받아 반짝이고 그을린 여울의 피부가 그 빛을 받아


사르르 부셔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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