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직장일기_2 - 2부 19장

본문

내가 살던 그 오피스텔이다. 여기는 혜경이도 알고 있는 곳인데…




“나중에 알았지만 여기 아는 언니가 살더라고요~ 오빠랑 같은 층이던데”




‘설마 정애는 아니겠지~ 나이차도 꾀 나고… 세상이 좁다고 하지만 설마~’




솔직히 조금 떨리는 심정으로 수위 아저씨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수를 누르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그냥 평소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그 곳에는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아는 언니야?”




“응~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안 언닌데~ 얼마 전에 들어왔어~ 백화점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지 뭐야~ 그 언니 지금 미국에 있다니까 아무도 없을 테니 긴장하지마 오빠~ 후훗”




“응? 긴장은 무슨~”




“오빠 긴장하니까 귀엽다~”




“하하~”




정애다. 정말 세상은 좁은 것 같다. 다행히도 정애가 집에 없어서 그렇지 마주쳤다면… 휴우~ 생각만 해도 등에 땀이 흐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 앞에 어떤 여자가 서 있다.




“누구세요?”




혜경이가 물으니 그녀도 묻는다…




“네? 정애 친군데… 누구세요?”




앗… 소리 지를뻔했다. 초밥집 사장님!!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어머~ 안녕하세요~”




“아~ 네에~ 안녕하세요~”




정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다. 뻘쭘의 극치다.




“오빠 아는 분이야?”




“아~ 우리 회사 앞에 그 초밥집 있자나~ 거기 사장님이셔~”




“어머 그래? 정애 정애 언니 친구세요?”




“네 그런데… 누구…?”




“저 정애 언니랑 미국에서 알던 동생인데 오늘 잠깐 여기 좀 빌린다고 언니한테 전화 했는데…”




“아~ 저는 그냥 잠깐 뭐 좀 가지러 들린거에요~”




“아~ 언니랑은 어떻게 아세요?”




나는 문 앞에 뻘쭘하게 서 있는데 수다를 떨려고 한다. 에라 모르겠다. 뻔뻔하게 신발을 벗고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오빠 커피 줄까?”




“응? 그래~”




“여기 커피가…”




“아~ 내가 찾아줄께요~”




“언니두 한잔 같이 마셔요~ 근데 오빠는 어떻게 아세요?”




“아~ 팀장님 저희 집에 식사하시러 자주 오셔서요~”




“어머~ 근데 우리오빠 이제 팀장 아닌데~”




“네? 그래요?”




“호홋~ 네~ 이제 그 회사 대표이사에요~”




“어머~ 어머~ 어쩐지~ 능력 있으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머나~ 잘됐네요~ 대표님~ 앞으로 더 잘 부탁 드릴께요~”




“아~ 네~ 뭐~~ 하하”




멋적게 웃는 사이 포트에 물이 끓어 커피를 타서 나는 한잔 가져다 주고 둘이 식탁에 앉아 수다를 떤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역시 빨리 친해지는구나~ 싶다.




정애를 둘러싼 이야기다. 느닷없이 수미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대표님도 정애 아는데~”




“어머~ 어떻게 알아요?”




“아니 팀장님이랑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요 제가 인사시켜 줬죠~”




“어머 어머”




“정애가 왜 친구가 없잖아~ 그래서 한 동네에 아는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아~”




“아니 근데 팀장… 아니 대표님은 댁 놔두시구 왜 여기…?”




“아… 저 이사했습니다”




“어머 언제요?”




“며칠 전에…”




“어머~ 정애가 서운해 하겠다아~”




별로 재미도 감동도 없고, 위험한 수위가 넘나드는 수다… 빨리 끝났으면 한다. 수미가 다행히 일찍 일어선다.




“그럼 둘이 이야기 나눠요~ 나는 먼저 갈께~”




반갑다. 빨리 좀 가줬으면 좋겠다. 심장이 떨린다.




“그럼 들어가세요~”




그녀를 보내고 나니 혜경이가 후다닥 소파로 와서는 내 얼굴을 살핀다.




“오빠 정애 언니랑 아무 일도 없었지?”




“응?”




“있었어?”




“한번 본 사람이랑 무슨 일이 있어~”




“음… 아무튼 틈을 주면 안되 오빤~”




“으이그~ 무슨 상상이야~”




피곤하다고 피하고는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아니 피했다. 왠지 더 이야기 하다가는 들킬 것만 같다.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조금 긴장이 풀린다. 조금 웃음이 나온다. 정애가 없는 사이 정애네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 조금 있으면 정애의 후배와 나는 섹스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인연의 실타래는 내 주위를 많이 벗어나지는 않는다.




‘운명? 그런건가? 피할 수도 없었겠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은 필연이겠군’




하고 생각하니 무거웠던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 너무 긴장하고 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냥 난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고, 또 여기서 뭐 실수를 좀 한다고 해도 그것 또한 운명이겠지…’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의외의 뜻밖의 곳에서 샤워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실소가 나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니 혜경이가 나이트 슬립가운을 입고 소파에서 일어난다. 아름답다. 섹시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실크 슬립… 속옷은 입지 않은 모양이다. 슬쩍슬쩍 비치고, 언뜻언뜻 보인다. 조금 힘이 들어간다.




“오빠 나도 씻고 올께?”




하더니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 없어져 버린다. 냉장고를 여니 맥주캔이 여러 개다. 하나를 따서 목을 축이면서 방 안을 보니 의외로 큰 침대에 발이 달려져 있다.




‘무슨 러브호텔도 아니구~ 뭐야?’




침대에 걸터 앉아서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벌러덩 누웠다. 피곤이 몰려온다. 조금 쌀쌀하기도 하다. 엉금엉금 기어서 침대로 들어갔다. 따뜻하고 포근하다. 정애의 침대라는 생각에 조금 더 실소가 난다. 그렇게 잠들었다.




새벽에 눈을 뜨니 혜경이는 내 옆에서 쥐 죽은 듯이 자고 있다. 왠지 미안하다. 간만에 오붓하게 있었는데 혜경이는 기분이라도 내면서 천천히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가가 팔베개를 해주니 안겨온다. 혜경이 냄새가 좋다. 머리에서도 살결에서도 달콤한 냄새가 난다. 아몬드? 코코아? 아무튼 그런 냄새다.




“으으음~~ 오빠 피곤했나보더라~ 칫~ 먼저 그냥 자버리구~”




“미안~”




“아니야~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아~ 근데 오빠 잠꼬대 하더라?”




“그래? 뭐라구?”




“아니 알아듣지는 못하게 했어~ 아무튼 웃기더라~ 킥킥~ 막 웃더니 인상쓰더니~ 무슨 꿈을 그렇게 버라이어티하게 꾸셨는지…”




“좀 챙피한데?”




“아니야~ 귀여웠어~ 히히”




하더니 더욱 안겨온다. 함께 안으면서 혜경이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주무르기도 하고 아무튼 난 여자의 엉덩이가 좋다.


슬쩍 손이 거기로 향하니 혜경이가 몸을 튼다.




“그냥 주무세요~ 기다릴 때는 안 해주더니~”




“하하~ 알았어~”




눈을 감으니 금새 다시 잠이 온다. 피곤하긴 피곤했나 보다.


그렇게 몇 번 새벽에 깨고서야 아침이 왔다. 오늘은 일찍 잠이 깨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지막 깨었을 때부터 선잠을 자고 더 이상 누워있기 따분해서 눈을 감고 선잠을 잤다.




일어나서 포트에 물을 올리고 커피를 타는 사이 혜경이가 깼나 보다.




“오빠~”




“으응~”




방으로 가보니 이불을 둘둘 말아서 침대에 기대 앉아서 나를 본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머리도 엉망이다. 어제 보았던 그 슬립은 입은 섹시한 그녀가 아니다.




“언제 일어났어 오빠?”




“지금 커피줄까?”




“응~”




“잠깐만”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가 나도 혜경이 옆에 앉아 왼팔로 그녀를 두르고 기대어 함께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빠~ 우리는 무슨 사이야?”




갑작스러운 질문~ 당황스럽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도 생각해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사의 아내였고, 재벌의 딸인 그녀가 내 왼 팔에 안겨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이 일까?




“…”




“…”




서로 말이 없었다. 혜경이는 나에게 무슨 의미지? 나를 도와준 이유는 따로 있는 걸까? 이 애가 나를 진짜 좋아하나? 뭐 혜경이랑 결혼을 해도 나쁠건 없다. 재벌의 딸이고, 그럼 나도 로열패밀리다.




“에이~ 아니야~ 오빠 정신 없는데 나까지~ 미안~”




하고는 날 보고 싱긋 웃어준다. 착한 아이다. 사랑스럽다. 내 커피잔과 그녀의 커피잔을 내려놓고 어깨를 돌려 세우고는 안아주었다. 착 감겨온다. 아침이라 그런지 아까부터 그 놈은 성을 내고 있었다.




혜경이가 슬쩍 잡아온다. 조금 웃더니 안아주던 내 팔을 풀러 고개를 숙이고 입으로 담아온다. 좋은 느낌!!




모든 남자는 아침에 하는게 좋다더니~ 우리는 그렇게 아침에 담백하고 기분 좋게 사랑을 나누고 헤어졌다. 방기사가 나를 태우러 왔고, 혜경이는 그곳에서 헤어졌다.




“대표님 아침은 하셨습니까?”




방기사가 묻는다.




“아니~ 난 아침 안먹어~”




“그래도~”




“신경쓰지 말구~ 어제 연락온데 혹시 있었어?”




“아닙니다. 전무님은 그냥 주무신다고 했더니 피곤하니까 잘 잠잘 수 있도록 신경 쓰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래 알았어~”




금방 회사에 도착 했다. 전략실 회의를 아예 내 방에서 하면서 후배녀석이 짜온 작전내용을 브리핑 받았다. 방향을 잘 못 잡고 응용력이 없어서 그렇지 작전을 철저하게 짠다. 나보다 훨씬 잘한다. 그대로 지시하고 양비서에게 영미를 불러달라고 하고는 기다렸다.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다.




인터폰이 울리더니 영미가 왔다고 한다. 들어오라고 하고 소파에 앉으니 영미가 곧 들어온다. 좀 떨리는 얼굴이고, 억지 반가움이 느껴진다.




“잘 다녀 오셨어요?”




다시 보아도 예쁜 아이다.




“응! 잘 지냈어?”




“네!”




“영미씨 남자친구 생겼어?”




“네? 아니 그게 아니구요~ 그냥 자끄 따라다녀서”




“괜찮아~ 그 친구 맘에 들어?”




“아니요~ 전 팀장님 아니 대표님이…”




“너나 나나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아?”




“네? 무슨?”




“너랑 나랑 연애를 하겠어~ 결혼을 하겠어?”




“…”




“첨부터 영미는 그냥 도와준거구~ 나는 영미씨가 그냥 평범하게 그 나이 또래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




조금 훌쩍인다. 닭 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영미야~ 내가 도와준거는 그냥 좋은 사람이 좀 도와준거라고 생각하고~ 또 어려운거 있으면 도와줄 사람이 주변에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는건 어떨까?”




“…”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린다. 휴지를 앞으로 밀어주고는 기다렸다. 달래주는 것도 나쁜 짓이다. 그냥 기다려야 한다. 한 20분쯤 흘렀을까? 영미는 울음을 그치더니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내가 미안하다~”




조금 웃어 보인다.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나보다 어른이다. 여자는 이래서 무서운 걸까?




“대신 어려운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기다~”




“네~”




밝게 웃어주고는 벌떡 일어나 인사를 꾸벅 하고는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와 안긴다. 그리고 말없이 키스를 해온다. 울어서 일까? 침이 미끈미끈하다. 그래도 맛있다. 아침에 하고 왔는데도 힘이 조금 들어간다.




“오빠~”




“응?”




“잘해줘서 고마워~”




“그래~”




뒤돌아 나간다. 뒷 모습도 예쁘다. 아마 그저 그냥 팀장을 했다면 저런 애를 쫓아 다니다가 결혼을 해서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은 그냥 초밥을 사다 달래서 사무실에서 먹었다. 무슨 찾아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누가 누군지도 모르게 한 20분 간격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대하다 보니 벌써 3시가 다 되었다. 더 찾아오는 손님들은 전무님 방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하고 나오면서 방기사가 따라 나오길래 그냥 있으라고 하고서는 커피숍으로 향 했다.




“오빠 여기~”




다른 사람인줄 알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내가 알던 그 수수한 옥미가 아니었다. 그날 룸사롱에서 보았던 것보다도 더 달라졌다. 아니 뭐랄까… 재벌집 둘째 며느리 같다. 럭셔리 해졌다.




“너 많이 변했다~”




“그래? 돈 좀 들였지~ 히히 오빠가 준 카드 열심히 쓰고 다녔거든~!”




“옥미야~”




“응~”




“내가 바빠서 그런데 용건만 간단하게 말할께~ 미안하다”




“아니~ 나도 그게 더 궁금해~”




“내가 너한테 해 줄수 있는게 돈인데~ 얼마나 줘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그리구 나 이렇게 사는거 솔직히 좀 불편해~ 우리 집에서두 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갑자기 회사 그만두고… 돈도 가져오고~ 해서”




“그럼 오빠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




“그냥 다른데 취직이나 시켜줘요~”




“음…”




“…”




“정말 그거면 돼? 나는 더 해줄 수 있어~”




“아니야~ 솔직히 많이 생각해 봤는데 이렇게 사는게 내 인생도 아니고… 오빠 덕분에 럭셔리하게 한번 살아봤으면 됐어~”




“그럼 일단 다른데 취직은 걱정말구… 다른게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 하고~”




“그래~ 아무튼 오빠 고마워~ 여러가지~”




“뭐가~ 난 너 이용만 한거 같아서 마음이 영 편하지 않다”




“아니야~ 뭐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최과장님 남편이랑 그러고 나서 이렇게 된걸~ 그리구 오빠가 오피스텔도 얻어주고, 뭐 그깟 몸뚱이 한번 굴린거 가지구~ 그거 때문에 오빠두 잘 됐구~ 난 그거면 됐어”




“그래~ 고맙구 필요한거 있음 연락해~ 오빠가 다시 전화해서 너 갈데 정해줄 테니까 이력서나 좀 써 놓구~ 그럼 나 바빠서 간다~ 자주는 못해도 연락 할께~ 잘 지내구~”




“그래~”




쿨하다. 정말 나쁜 놈이다. 내 할말만 하고는 30분도 지나지 않아 차를 마시는둥 마는둥 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래도 받아주는 옥미가 고맙다. 좋은 곳에 자리를 알아봐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실로 돌아가니 방기사가 어쩔줄 몰라하면서 로비에서 나를 반긴다.




“왜~ 똥마려운 강아지 처럼~”




“대표님… 지금 대표님 혼자 다니시면 안됩니다. 저도 혼나구~”




“알았어 다음부터는 안 그럴께~ 방기사 백화점 좀 다녀와라~ 난 그 동안 사무실에 있을거니까…”




“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응 가서 요새 여자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로 빽하나만 사와~ 아니 다른 브랜드로 두개만 사와~ 어린 애들이 가지고 다닐만 한걸로~”




“예 알겠습니다”




“여기 카드 가져가~”




지갑을 꺼내는데 방기사가 웃으면서 저지한다.




“대표님… 대표님 쓰시는건 다 비서실에서 결제 됩니다. 그냥 말씀만 하셔도 됩니다”




“아참… 알았어… 수고해~”




엘리베이터도 전용 엘리베이터다. 올라가려는데 양상무와 김이사, 송이사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오셔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아~ 네~ 함께 타시죠~”




엘리베이터에서 모두 뻘쭘해 한다. 얼마 전에만 해도 팀장 나부랭이였던 놈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대표이사가 되었으니 나도 이해가 간다.




“그렇게 어려워 마세요~ 아시다시피 탁 전무님이 대표로 취임하시기 전까지 M&A 때문에 제가 임시로 있는 거니까요”




“아… 네… 그래도… 뭐 불편하시거나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아 예…”




재수없는 놈들이다. 언제든 실세에 붙을 수 있는 놈들… 실력도 형편없다. 그래도 조직은 돌아가는걸 보면 참…




그들과 함께 곧바로 임원 회의실로 향했다. 임원 회의의 안건에 대해서는 회의장에서 처음 본 일들이다. 우선 대표로써 인사를 했고… 나머지는 탁 전무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뭐 좀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속속들이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5시나 되었을까? 인터폰이 울리더니




“대표님 탁진영 사원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후다닥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애처럼 와서 와락 안긴다.




“오빠 우리 일찍 밥 먹으러 가자~ 응?”




“야 가서 문이나 좀 닫구와~”




“어? 알았어~”




“진영아 여기 회사에서 우리 둘이 있을 때처럼 하면 안되~”




“칫~ 알았어~ 오빠가 맨날 바쁘다고 안 놀아 주니까 그렇지이~”




하면서 매달려 있는데 양비서가 차를 들고 온다. 진영이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그냥 그대로 있다. 양비서는 눈을 절대 위로 떠서 사람을 보지 않고 차만 두잔 놓고 나간다.




양비서에게 나 먼저 나간다고 하고는 방기사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놀랍다. 뭐 영화나 그런데서나 보던 그런 2층 단독 빌라… 한강이 한눈에 보인다. 바닥은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슬리퍼 없이는 다니면 안되겠다.




홍이사가 준다던 한남동 빌라보다 훨씬 좋다. 비교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이 정도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우와~ 오빠 여기 완전 좋다~”




“그러게 나도 첨 와본다~”




짐은 예상대로 옷만 옮겨와 있었고 뭐든 다 새것이다. 돈이 좋다. 방기사는 윗층을 쓰도록 되어 있어 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저는 위에 있을 테니 필요한게 있으시면 부르세요~ 전 출퇴근 때만 내려오겠습니다”




라고 하고는 휙 올라가 버린다. 이렇게 된 거 신경 안 쓰고 지내야 한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진영이는 뭐가 좋은지 룰루랄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구경을 하는데 나는 여독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어제 잠이 부족한 탓인지 좀 졸립다.




욕실을 여니 여기가 가장 마음에 든다. 우선 넓고 욕조와 샤워시설, 그리고 화장실이 각각 따로 되어 있다. 물을 받아놓고 옷을 갈아입으러 가니 진영이가 따라와 옷을 받아준다.




‘내가 꿈꾸던 생활이 이런 것이었지 아마?’




왠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진영이는 뭐가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 이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




“에이~ 뭐야 오빠는 나랑 있어서 싫어?”




“아니 그게 아니구~ 나야 좋지만 니가 너무 좋아하니까…”




“그냥 여기두 좋구~ 또 오빠랑 여기서 계속 있을 생각 하니까 더 좋아~”




‘계속? 신혼살림이라도 차리자는 건가?’




“오빠 물 받아놓았는데 목욕할래?”




“응? 아니 난 별루~”




“그럼 오빠 뜨거운 물에 몸 좀 담그고 나올께”




홀라당 벗은 채로 욕실에 가니 반도 안 담겼다. 아마 욕조가 커서 그런가 보다. 러브호텔에나 있을법한 월풀욕조… 몸을 넣고 눈을 감고 잠시 앉아 있으니 물이 차온다. 느낌이 나쁘지 않다. 찰랑찰랑 차도록 두었다. 조금 뜨겁게 해서인지 위로는 오한이 든다. 피곤해서겠지…




그대로 주르륵 앉아서 눕는 듯이 머리까지 들어갔다. 처음에는 뜨거웠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진다. 숨이 차다. 이대로 죽어도 뭐 이정도 살았으면 나쁘지도 않다. 조금 더 참아보다가 턱에 차도록 뛰쳐나와 숨을 들이마셨다.




‘뭐든 돈이 좋긴 하지만 마음이 편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린다. 이런걸 즐기기 위해서는 많은걸 포기해야 하는 것을 예전에는 있는 놈들의 위선이라고 생각 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조금은 간다.




좀 공허하고~ 바라던 장난감을 사주었는데 바라던 만큼 재미 없는 아이처럼 왠지 허탈하다. 그리고 난 여길 되도록 빨리 정리도 해야 한다. 그리고 빠르게 정리해 나가는 중이다. 여자들도 회사일도…




“오빠~ 오래 씻네~”




진영이가 문을 열고 욕조에 있는 나를 보며 싱긋 웃으면서 들어온다. 다 벗고 있다. 부끄러운줄 모르든지 몸매가 자신 있든지…




“들어올래?”




“아니 난 샤워만 할래~”




하더니 샤워실로 들어가 물을 튼다. 그냥 평소대로 난 팀장이고, 이런 책임감도 없고, 진영이 같은 철없는 애나 보면서 가끔 일탈이나 하는 그런 평범한 삶이 그리워 진다.




‘난 이제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겠지? 이미 발을 들였으니…’




왠지 그때 노우를 했다면? 하는 생각이 들고 다시 물어 들어가 숨을 참아본다. 저 밖이 현실이고, 나는 지금 잠시 물어 들어와 숨을 참고 있다. 언제 까지나 참을 수는 없으리라…




욕조를 나와 물을 빼고는 진영이랑 장난처럼 샤워를 함께하고, 또 장난처럼 그 애가 또 내 것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장난처럼 섹스를 길고 재미나게 했다. 그리고는 잠들었다.




도통 요새는 꿈을 꾸지 않더니 어제는 꿈을 꾸었다. 나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험한 산이다. 한발 한발이 중요하고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상이 보이고 나는 정상에 올라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소리를 질러 봤다. 메아리는 없다. 이상하다고 여기는 순간 누가 등을 떠민다.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뒤를 돌아보니 영미, 혜경이, 옥미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반가운 느낌이라기 보다는 나를 원망하는 것만 같다. 그러더니 어느새 최과장, 정대리 그 동안 스친 여자들이 섬뜩하게 한자리에서 나를 보고 한결같이 웃고 있다. 역시나 친근한 느낌은 아니다. 느닷없이 땅이 꺼지고 나만 그 곳에 떨어진다. 그녀들 모두 그대로 웃고 있다.




그러다가 깨어 버렸다. 식은 땀을 흘리는 나를 진영이가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면서 걱정스런 눈으로




“오빠 꿈꿨어? 어디 아파?”




“응? 응? 으… 응…. 괜찮아~ 꿈꿨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물을 한잔 마시고 나니 선명해진다. 무섭다기 보다는 죄를 씻는 느낌이랄까… 떨어지면서도 이제 끝이구나~ 미안했다… 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진영이와 함께 계란 후라이를 만들어 먹으면서 아침에 섹스를 한번 더 하고는 출근을 했다. 왠지 하루종일 멍하게 보낼 것만 같다. 또 그렇게 보냈다. 방기사를 통해 소희에게 가방을 전해주었고, 나머지 하나는 영미에게 보냈다. 물론 다 방기사를 통해 보냈다. 어제 꿈에 모두 보여서 그런지 오늘은 왠지 얼굴을 마주 대하기 싫어진다.




오늘도 손님들이 찾아온다. 거래처, 회사 구내 국회의원 등등 계속되는 손님 접대였다. 처음에는 이런 사람들을 직접 보는 일이 신기하기만 했지만 서로 같은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해서 오후에는 정말이지 곤욕이었다. 같은 말은 20번도 넘게 한 것 같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니 왠지 조바심이 난다. 월터가 준 자료를 아직 10분의 1도 읽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그걸 살펴볼 수는 없다. 아직도 손님 예약은 끝도 없었고, 말만 대표지 회사에서는 항상 감시 당하는 느낌이다.




일찍 퇴근하면서 진영이도, 혜경이도 물리치고 집에 돌아와 노트북과 씨름을 했다. 월터가 준 자료를 검토해서 오늘까지 메일을 보내줘야 한다. 월터가 새삼스레 보고 싶어 진다.




새벽까지 자료를 검토해서 대략의 의견을 메일로 써 보내고야 여유가 좀 생긴다. 아직도 봐야할 자료는 산더미지만 일단 오늘 메일은 보냈으니 조금 여유가 생긴다.




딩동~




‘응?’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조금 넘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방기사가 윗 층에서 후다닥 내려온다.




“대표님 제가 열겠습니다”




인터폰을 들어 누군지 확인 하고 문을 열어준다. 영미랑 소희? 너희가 여길 어떻게 알고? 그리고 이 시간에 여기를 왜? 그것도 둘이 함께?




문을 열어주는 방기사를 뒤로하고 들어오면서 영미와 소희가 당당하게 들어온다. 왠지 불길하다.




“아직 안 주무셨죠?”




“응? 지금 자려고 했는데 너희가 여길 어떻게 알고?”




“아까 저 아저씨한테 물어봤죠~”




방기사가 머리를 끄적인다. 뒷 짐을 지고 문 앞에 서 있는 방기사를 올려보냈다. 영미가 소희는 물을 달래더니 할 이야기가 있다고 나를 소파에 불러 앉히고는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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