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28장

본문

세상에.. 이부리그님. 제 주위에 두 명을 포함해서 이부리그님은 세 번째 정답자입니다. 


어떤 리플인지는 말씀 안 드려도 아실 듯 합니다. 가까이 살면 귤이라도 하나 드릴 건데.. -_-;;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정답을 남기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건 다른 분들에게 남극


일기의 범인은 유지태라고 감상 리플에 적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집니다. 이 글의 장르


는 "직장 로맨스 불륜 추리 패티쉬 판타지 싸이코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_-;;;




제 의도를 맞추신 그 리플을 보고 정말 기뻤지만, 정답이기 때문에 지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설정이 공개되면 저는 상관없지만, 아직 모르시는 분들의 재미가 반감될 것 같았습니다.


제 글을 깊게 읽어주신 이부리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감기 - 35 개미의 날개 22




사무실로 돌아와 조금전 일을 궁금해 하는 표정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오전 업무를 시작했


다. 공유폴더에 쌓여있는 파일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기획서에 오더된 대로 제작되었는지 확


인을 하고 있을 때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김유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오며 조용해졌던 사무실에 몇 가지 잡음이 흘러 나왔다. 그 소리의 주된 원인은 그녀와 


내가 나눈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미운 오리새끼들에게 그녀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지난 주 동안 거의 듣지 못 했었던 밝은 웃음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왔다. 




그들이 흘리는 웃음소리가 마치 얼음이 깨지기 전에 흘리는 비명소리처럼 불안하게 느껴졌


다. 아직은 완전히 얼어붙지 않은 살얼음판처럼 이들을 향해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것이 조


심스럽기만 하다. 남자 직원들이었다면 이런 괴기스런 분위기를 단 한번에 깨고 터놓고 이


야기할 수 있으련만,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외형뿐만 아니라 태양과 


지구만큼이나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면 볼 수 있는 


것이건만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저 먼 공간에 떠 있는 것 처럼 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에 


단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 조차 힘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여직원이라는 존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들이었다.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사무실안에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내색도 의식도 하지 않으려 해보지만 그럴수록 신경


이 쓰이고 집중이 되는 것은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또 한 개의 파일을 열어 


몇 개의 편집할 부분을 고쳐가고 있을 때 향긋한 냄새가 파티션 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감


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기분좋게 만드는 그 냄새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조금전 


그 표정 그대로 웃고 있는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드세요. "


"먹던 건 아니지? "


"킥킥..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안 따진다면서요? " 


"잘 마실께. 고마워. "




종이컵에 가득 담긴 진한 유자향을 목안으로 넘기고 있을 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던 그녀


가 고개를 돌려 문득 물어왔다. 




"팀장님. 발레 좋아하세요? "


"큭.. "




먹던 유자차가 사례가 걸린 듯 목안에서 멈추었다가 가까스러 흘러 내려갔다. 한순간 막혔


던 숨에 잔기침을 몇 번한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 그녀의 눈빛


은 털실 뭉치를 발견한 고양이의 그것이었다. 지독스럽게 짖궂은 표정의 그녀가 입가에 또 


그 뜻 모를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물어왔다. 그리고 난 그 질문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좋아해. 발레라면 역시 페트루슈카잖아? "




그녀가 어떤 의도로 질문을 한지 뻔히 알기에 그것에 빠지는 바보짓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


었다. 그리고 평소에 좋아하는 발레는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곡 중에 하나인 페트루슈카


를 정말 좋아했었다. 가질 수 없는 자의 소외감과 자신의 죽음앞에서도 웃으며 조롱할 수 있


는 광대의 익살스러움은 나에게 비극이기 전에 지독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었다. 마지


막 웃음과 함께 힘차게 비상하는 처연할 정도의 그의 몸짓은 마치 꿈속의 내 모습과 오버랩


되어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국내에서 거의 공연하지 않


는 작품이기에 다시 한번 초청공연이 기획된다면 꼭 보고 싶을 만큼 페트루슈카에 대한 기


억은 치명적일 만큼 강렬했다. 페트루슈카는 내 오랜 악몽의 오마쥬였다.




"백조의 호수는요? "


"큭큭.. 그건 최근작들이 원작과 달라서 싫던데. 본 적 있어? "


"그럼요. 아주 납작하던데요! "




"꺄하하하.. 낄낄.. "




그녀의 큰 목소리에 조금전 탕비실에서의 말을 들었던지 여직원들이 떠들썩하게 웃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 만큼 불안하게 금이 가 있던 얼음이 단단하게 얼어가는 느낌이었


다. 아직은 신중하게 내딛어야 하지만,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긴다면 단단하게 얼


어붙은 백조의 호수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배려에 고마움을 


담아 한 차례 고개를 끄떡여 준 후 바쁜 일정에 밀린 업무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키보


드 옆에 놓여진 종이컵에서 그녀가 전해주는 마음이 향긋하게 퍼져 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여직원들과 내가 주고받는 파일의 교환이 뜸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왼손목을 바라보니 어느세 시계의 바늘이 12시 10분 전을 가르키고 


있었다. 수정된 파일이 왜 올라오지 않나 싶었더니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버린 여직원을 데


리고 더이상 작업은 무리일 것 같았다. 




"점심 많이 드시고 오후에 다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작업중인 파일은 저장하신 후 


다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


"수고하셨습니다. "


"팀장님 같이 내려 가시죠? "




이제 조금 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작업을 할 때 나도 모르게 몸에 스며드는 긴장감이 한


순간에 사라지며 그 빈 곳을 숨어있던 감기 기운이 채워오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다른 여직원들과 함께 내려가기를 물어오는 그녀에게 걸어갔다. 몇 명의 


여직원은 사무실을 떠나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가져왔어? "


"예, 왜요? "


"차키 좀 빌려줘. 네 차에서 눈 좀 붙이게. 감기가 심해서 자야할 거 같아. "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핸드백에서 열쇠 지갑을 내게 건내 주었다. 내 지포 라이터 만큼이나 


낡은 열쇠 지갑을 보자 언젠가 새 것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깊은 것이라면 선


물을 줘도 소용이 없을 테니 나중에 살짝 누구에게 받은 건지 물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열


쇠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복도로 그녀와 함께 걸어 나갔다. 




"고마워. "


"그럼 팀장님 식사는요? "


"난 아프면 잘 안 먹어. 차는 어디에 있어? " 


"지하 2층 가운데 쯤? 헤헤.. 말로 설명하긴 좀 그렇네. 같이 갈래요? "




조금전까지 그녀를 기다리던 여직원 몇 명은 그녀와 나의 이런 다정한 이야기에 무척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과 지하 2층을 각각 누르는 그


녀에게 주차된 곳을 물었다.




"넌 밥먹으러 가야 하는데 그럴 수야 있나. 차종이랑 번호만 가르쳐 줘. 내가 찾아볼께. "


"하얀색 베르나 2758요. "


"땡큐. 혹시 내가 1시 넘어서도 안 보이면 나한테 전화 좀 해주고. 바로 올라올께. "




점심을 먹기 위해 내려가는 다른 직원들때문에 엘리베이터는 출근때 만큼이나 꾸물거리는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홀수층마다 멈추던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1층에 도착하자 열림 버


튼을 누르고 있던 그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많이 아프시면 약 좀 사드릴가요? "


"고마워. 부탁할게. 다들 점심 많이 들어요. 조금만 먹으면 감기 옮아. "


"감기는 바보들이나 걸리는 거네요. 킥킥.. "


"언니 너무 웃겨요! "




그녀의 말에 복도에서 기다리던 여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나지막히 울려퍼지고, 얼른 닫힘버


튼을 누르며 그녀에게 한방 먹였다.




"그럼 넌 직빵이야. "


"참네.. "




여자들이 주차하는 습관을 보면 기둥과 벽에 가까이 붙어 있는 곳을 피하는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다. 주변과 거리감을 잘 느끼지 못 하는 여성 특유의 공간지각능력 때문이라고 할까. 


지하 2층에 내려와서 줄지어 서있는 기둥과 벽을 제외하고 가장 주차하기 쉬운 곳을 찾아 


걸어가자, 점심시간이라 빠져나간 듯한 빈 공간사이에 다른 자동차들과 함께 주차된 하얀색 


베르나가 눈에 들어왔다. 차량번호를 확인하지 않아도 "이 차량의 주인은 여성 운전자입니


다."라고 적혀 있는 듯한 분홍색 인테리어 시트가 그녀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코트를 벗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트를 뒤로 힘껏 밀고 열쇠를 꽂아 차의 시동을 걸


었다. 평소에 관리를 잘 했는지 부드럽게 돌아가는 엔진이 실내를 따뜻하게 덥히도록 기다


리며 등받이를 뒤로 밀고 있을 때, 마치 여동생의 방에 들어온 것 같은 여자 냄새가 차안에 


희미하게 풍겨져 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만큼 밀려오는 잠에 빠져들어 갈 무렵 이불처럼 덮


고 있는 코트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감겨 가는 눈으로 바라본 액정에 뜬 이름은 


"마님"이었다.




"경아, 점심 먹어야지? "


"자기 목소리 안 좋네. 많이 아픈거야? "


"아니, 감기가 올려나 봐. 잠시 눈 좀 붙이면 돼. 걱정마. 경아. "


"음.. 약은? "


"조금있다가 사온다고 했으니까 그때 먹을려구. "




그녀에게 대답하고 있으면서도 눈이 감겨오는 통에 목소리는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일기장


을 다 읽어 본 그녀는 내 몸상태를 나만큼 잘 알기에 고장난 녹음기처럼 늘어지는 내 목소리


에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퇴근할 때 자기 회사로 데리러 갈까? "


"큭큭.. 내가 애도 아니고.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


"그래도.. "


"너 피곤하잖아. 걱정마. "


"일단 푹 자. 나중에 전화할께. "


"응.. "




푹 자라는 그녀의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제대로 껐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벗어 놓은 코트를 모포삼아 끌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나지막히 울리는 차량 엔진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를 간지럽히다가 어느세 기억에서 끊겨 버렸다. 




어릴적 바닷가에 간 기억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사람과 여동생


이 된 꼬마 아이와 함께 간 그 바닷가에서 난 외떨어진 채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엄


마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어느날 갑자기 가족이 된 


그들속에 들어가기 싫은 반항기는 아직 덥혀지지 않은 초여름의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헤엄


치게 만들었다. 몸에 잔 소름이 돋고 느슨했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진다. 


한참 헤엄치고 있는 내 뒤로 다급해 하는 아버지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어


릴적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때 사람들이 더러운 년의 자식이라 욕해도 그저 흔한 욕


중의 하나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존재가 무언가를 보았는지 날 향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화가 났다. 저 사람만 없으면 엄마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건데 하는 분노가 더 깊은 바


다로 향하게 날 이끌고 있었다. 몇 번의 높은 파도를 넘어 헤엄치고 있을 때 조금전 보다 더 


높은 파도가 내 몸을 휘감고 깊은 수면밑으로 잡아 당겼다. 마치 봄볕에 아지랑이가 피어오


르는 듯한 빗줄기가 물속 깊은 곳에서 손짓하는 듯 펼쳐지고 있었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그 화려한 빛덩이에 물속이라는 것도 잊은 채 손을 내밀려고 할 때 무언가 강한 힘이 


내 작은 몸을 잡아 채어 수면밖으로 끌어 올렸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의 투박하고 굵은 선의 


손이었다. 




"팀장님.. 팀장님.. "


"음.. 으응? "




언제나 잠들기만 하면 떠오르는 옛기억들이 남긴 자취에 흠뻑 젖어있는 내 얼굴을 오전에 


내가 건내 주었던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던 여직원의 얼굴이 망막에 자리잡혀 왔다. 그 모


습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많이 아프신 거 같은데.. 여기 약 사왔어요. "


"응.. 고마워. "




그녀가 건내주는 하얀 봉투에는 몇 개의 알약과 함께 갈색의 유리병이 아직 온기를 잃지 않


은 채 담겨 있었다. 




"아직 따뜻하네. 고마워. "




물속에 빠졌다가 방금 꺼내진 사람처럼 힘이 안 들어가는 손에 억지로 쥐어 병을 따고 입가


로 가져갔다. 추운 날씨에 이 정도 온기를 유지할려면 품에 안고 왔을 건데, 그녀의 잔정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역시 대장 오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몇 개의 이름 모를 


알약과 함께 뜨거운 물약을 마시자 몸안에 온기가 휘도는 것이 느껴진다. 




"뭘요. 팀장님이 챙겨 준 거에 비하면.. "


"내가 뭘? "


"이번에 제가 대리된 거.. 팀장님이 만드신 거 아닌가요? "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결재가 떨어졌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홍보부장이 


전권을 대행해 준다고 해도 이 정도로 빠를 수가 없을 건데 하는 생각에 그녀가 어디서 들었


는지 그 출처를 묻게 만든다. 다음주 쯤에나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들었는데? "


"점심먹는데 인사부 애들이 축하한다고 그러더라구요. 다음주에 명령서 나올 거라고요. " 


"나와 상관없어. 넌 대리가 됐어도 한참 전에 됐어야 했는 걸. 늦었지만 이제서야 네 자리에 


앉은 거야, 내가 한 게 아냐. "


"걔들이 하는 말은 좀 다르던데요. "


"뭐라 하던데? "


"제가 보지도 못한 제안서를 제가 제출했다고요. "


"훗.. "




그 놈의 제안서. 회사안에서 돌고 돌아서 지금쯤에는 어디까지 흘러가고 있을지 상상도 되


지 않는 애물단지 제안서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더이상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이미 그녀와 난 회사안에서 만큼은 모든 것을 함께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우리 레드썬 계획.. 타켓이 몇 가지가 있었지? "


"예. 그년, 홍보부장, 경영진. 이렇게 3개죠. "




한혜진이 그녀에게 확실한 자리매김을 해가고 있는 모습에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게 한


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었으면 사이좋은 동료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건데 하는 생각들과 한


편으로는 그 소속감도 팀의 해체와 함께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다는 스스로의 자위가 머릿


속에서 섞이고 있었다. 눕혀져 있는 등받이를 바로 세우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녀가 들


어오며 함께 스며든 한기가 몸의 떨림을 더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빠진 게 있어. "


"저한테 숨기신 건가요? "


"아니. 말을 못 한 거야. "


"왜요? 팀장님과 저 사이에는 이제 모두 다 말하기로 하지 않으셨어요? 절 믿는다면서요! "




히터의 세기를 더 높이고 덮고 있는 코트를 목까지 끌어 당기며 몸에서 빠져나가는 체온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래도 몸의 떨림은 쉽사리 


멈추지 않고 있었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저려오는 것이 아무래도 몸살이 와도 단단히 올 모


양이었다. 그런 내 손에 차갑게 식어버린 약병을 그녀에게 건내주며, 화가 난 듯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 보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 사람은 화가 났을 때가 더 귀여운 듯한 얼


굴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봐. 그리고 나서 나한테 화를 내도 늦지 않아. 널 속이려고 한게 아니


라니까. "


"말해보세요. 왜 숨겼는지.. "


"그런데 뭐 덮을 만한 거 없어? 추워서 죽겠는데.."


"참네.. 제 차에 이불이나 베게라도 놔뒀을 줄 알았어요? 제가 숙자예요? "


"숙자? "


"노숙자요! "


"큭큭.. "




차안의 공기는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엔진 덕분에 충분히 덥혀졌지만 지끈거리는 두통과 몸


의 떨림은 쉽사리 멈추지 않고 있었다. 덮을 만한 게 없다고 그녀가 말했지만 몸은 미련을 


버리지 못 하게 만들었다. 차안 구석을 살펴보며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때릴 것 처럼 째려


보고 있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 제안서 내가 쓴 거야. " 


"예? "


"내가 제출한 걸 기획실장이 지 이름으로 바꿔서 사내망에 올렸더라. 대충 그림 나오지? "


"그럼 그걸 다시 제 이름으로 바꾼 건 팀장님이시군요? "


"그래서 Positioning 설명할 때 기획실장도 함께 노리고 있다는 말을 못한 거야. "




뒷좌석에 놓여진 작은 쿠션을 가져와 코트속에 넣고 끌어안았다. 그런 내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그녀가 자신의 목에 감겨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감아주고 있었다. 몸에 둘러


진 것이 많아질 수록 몸의 떨림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어릴적 겨울이면 늘 덮고 자던 붉은


색 밍크 담요가 오늘따라 너무나 그리웠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이렇게 떨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전 말을 계속 이었다. 




"그 말을 하면 당연히 니가 가져가야 할 걸 내가 애써서 만들어 준 것 처럼 공치사하게 되잖


아. 너한테 숨긴 게 아니라, 말을 못한 거라구. " 


"의외로 고지식 하시네요. 계산만 빠를 줄 알았는데요. "


"고지식하긴.. 너니까 그런 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죽든 살든 신경도 안써. "




목도리를 감아주느라 상체가 내게 숙여진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는 조금전


까지 잔뜩 스며들었던 푸른색 냉기가 부드러운 노란색으로 녹아 있었다. 부담스러운 그 눈


빛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우리가 서로 볼 수 있는 곳에 있든, 그렇지 못 하는 곳에 있든, 한번 믿음을 주기로 했다면 


의심하지 말고 가야 돼. 그게 바로 너와 나야. 그러니까 앞으론 그냥 믿어! 알겠어? "


"팀장님.. "




퉁명스럽게 내뱉는 내 말에 그녀가 부드럽게 날 불러왔다. 그 목소리에 무심코 창밖을 바라


보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언제 다가왔는지 그녀의 얼굴이 바로 옆까지 도착해 있었다. 


단 둘 만이 있는 조용한 차안에서 일어난 이 미묘한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당항하


고 있자 목에 둘러진 목도리의 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앞으론 팀장님만 믿을게요. "




웃으며 얼굴을 바짝 붙여오는 그녀의 얼굴을 피해 운전석의 문을 열며 일어났다. 지하 주차


장에 숨어있던 차가운 바람이 실내로 불어오며 잠들어 가던 떨림을 다시 요동치게 만들었다.




"올라 가자. "


"왜요? 또 우리 둘이 있으니까 무슨 일날까 봐 겁나요? "


"넌 모르는가 본데, 난 니가 무서워. 큭큭.. "


"웃기시네. "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을 때 차를 잠그고 달려 온 그녀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메달려 왔다. 양복과 코트를 입고 있지만 팔뚝으로 전해져 오는 그녀의 볼륨은 결코 발레리


나가 아니었다. 이거 말하면 정말 죽음일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가에 잔뜩 스며들어 


있는 내 미소를 놓칠 만큼 그녀는 둔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한다고 그렇게 변태같은 웃음을 지어요? "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외치는 왼쪽 뇌와 이왕 망가진 거 끝까지 가보자고 유혹하는 오른쪽 


뇌의 싸움은 저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단번에 결정나고 


말았다. 내 팔을 감고 있는 그녀의 팔을 살며시 풀고 적당한 거리를 벌리며 그녀를 쳐다보았


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잔뜩 기대하고 기다리는 그녀에게 또 한번의 상처를 주게 되는 것


이 너무나 미안했지만, 몸 상태가 안 좋을 때 장난치는 것은 내 오랜 습관중에 하나였다. 




"뽕브라 쓰니? "




그 말을 내뱉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힘껏 뛰어 가는 내 뒤로 그녀의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같이 가요! 기다려 주세요! "




저 엘리베이터를 놓치면 난 죽는다는 절박감에 외친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방금 막 문이 닫


힐려고 하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리며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신히 엘


리베이터에 올라 조금전 날 기다려 준 다른 부서 직원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거칠게 


닫힘 버튼을 여러번 눌렀다. 문이 반쯤 닫혀갈 무렵 멀리서 그녀가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쁜 놈아! 거기 안서! "


"아는 분이면 같이 가죠? "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 하는 그 사람에게 난 짧막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


고 엘리베이터는 11층을 향해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르는 여자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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