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감기 - 2부 25장

본문

감기 - 32 개미의 날개 19






유경이 가져다 준 유자차를 마시자 이곳에 오는 동안 내내 치밀어 오르던 욕지기가 그녀의 


애정과 향긋한 유자향에 희미해져 간다. 어머님의 부름에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저녁


을 드셨는지 말끔하게 치워진 식탁위에는 미래의 장모님께서 미래의 사위에게 차려주신 저


녁상이 깔끔하게 놓여져 있었다. 높은 고봉처럼 담긴 뜨거운 밥공기를 기분좋게 바라보니 조


금전의 기분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식탁의 맛깔스러운 풍경에 군침이 돌 뿐이다. 




"시장할 건데 어서 들게. 우린 벌써 먹었네. "


"감사합니다. 어머님.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


"자네가 어디 남인가.. "


"배고플 건데 어서 먹어. 물 가져다 줄께. "




옆에서 유경까지 거들자 더이상 수저만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얀 김을 자아내고 있는 밥


을 수저로 듬뿍 떠서 입안에 가져간다. 혀가 데일 것 같은 뜨거움이 얼어있던 몸안에 강렬한 


온기를 전해 준다. 한 그릇을 다 먹고 수저를 내려 놓으려 할 때, 어머님께서 또 한공기의 밥


을 담아 주시며 내게 권하셨다. 벌써부터 첫 사위라 생각하시는 어머님의 넘치는 정에 배가 


가득차 올랐지만,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 물을 조금씩 마시며 반찬보다 밥 위주로 수저를 놀


리기 시작했다. 군침도는 냄새로 유혹하는 반찬까지 먹었다가는 처음으로 어머님이 담아주


신 밥을 남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그런 모습이 무척 배가 고팠다가 생각이 드셨는지 어


머님께서는 유경의 반대편에 앉으셔서 내 수저위로 반찬을 하나씩 올려 주신다. 그 모습에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도 들어 보게. 이번에 담은 건데 맛이 참 좋네. "


"지금껏 제가 먹어 본 것 중에 최고입니다. "


"나중에 갈 때 좀 싸줄까? "


"그럼 감사하죠. 어머님. "




"크흠.. 크흠.. "




뭔가를 싸준다는 말을 들었는지 마루에서 TV를 보고 계시던 아저씨께서 괜히 헛기침을 하


며 무게를 잡고 계셨다.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을 흘리시던 어머님께서 내게만 들릴 정도로 나


지막히 말씀을 하신다. 




"저 양반은 신경쓰지 말게. 자기가 좋아하는 거 준다고 저러는 모양이니... 후훗.. "




어머님의 넘치는 정에 세 공기를 먹어서야 겨우 부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크게 쉰다면 지금까지 먹었던 것이 모두 분출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집에서도 편


안한 셔츠를 입고 TV를 보고 계시는 아저씨의 맞은 편 쇼파에 유경과 함께 조심스럽게 앉았


다. 그런 우리의 모습에 처제는 뭔가 잔뜩 기대한다는 눈빛을 흘리며 아저씨의 옆에서 우리


를 지켜보고 있다. 




"며칠 굶었냐? 내가 밥먹고 오라고 했을 건데? "


"어머님 밥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과식했습니다. "


"밥 다 먹었으면 그럼 집에 돌아가라. "


"아빠 ! "




병원에서도 지겹게 당했던 아저씨의 심술에도 꿋꿋하게 쳐다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


저씨게 큰 절을 올린 후 무릎을 꿇고 말씀을 올렸다. 




"밥만 먹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한가지 청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




반짝거리는 금테 안경을 고쳐쓰는 것으로 내 대답을 들을 준비를 마쳤다는 듯한 아저씨게 


무릎을 꿇은 상태로 조금전 말을 이었다. 




"유경이에게 청혼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부디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안 된다면? "


"어이구. 이 양반이 또 심술 부리네.. "




식탁을 정리하다가 오셨는지 어머님께서 도움을 주실려고 했지만, 심술궂게 변한 아저씨의 


얼굴은 변할 줄 몰랐다. 




"남들 만큼 돈을 많이 벌지는 못 하더라도, 제가 가진 것,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서 유경이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간 절 지켜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 


제가 그동안 허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


로 항상 유경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부디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


"부친께는 말씀드렸나? "


"아버지께는 전에 말씀을 드렸지만, 아직 정식으로 인사드리지는 못 했습니다. 인사는 오늘 


두 분 어른께 허락을 받은 후 드리고자 미루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전부터 유경이라면 


당신께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누차 말씀을 하신 터입니다. 아버지께서도 병원에서 유


경이를 지켜 보셨으니까요. "




잠시 반짝거리는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닦기 시작하던 아저씨가 내 가슴을 물끄러미 쳐다


보더니 한마디를 뱉으셨다. 그 말에 한동안 난 대답을 하지 못 했다. 




"네 몸은? "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자신이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을 보내는 문제인데, 사위가 될 남자


의 몸이 병약하다고 생각되면 어찌 걱정이 되지 않고, 또 망설여지지 않겠는가. 특히나 아저


씨는 나와 수 개월 동안 한 병실에 나란히 누워 있었던 사이였기 때문에 서로의 몸에 대해서


는 자신만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얼마나 다쳤었는지를.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고


민을 하다가,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오랜 경찰생활로 잔뼈


가 굵은 아저씨는 애초에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지난 번 부서졌던 가슴뼈는 다 붙어서 이제는 이상없지만, 만약 또 다시 비슷한 사고가 나


서 혈관이 손상된다면 그때는 장담할 수 없다고 담당의였던 선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봉


합된 가슴 혈관은 지금 모두 자리잡은 상태입니다. "


"자네 이제 그럼 괜찮은 건가? "




아저씨가 만들고 있는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함이신지 따뜻한 목소리로 물어 오시는 


어머님의 걱정어린 말씀에 대답대신 그저 웃음으로 대신해 드렸다. 괜찮다고도, 아니라고


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괜찮을 몸이었다면 1여년 동안 병원에서 꼼짝도 못 하고 


시체처럼 누워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저씨를 간병하기 위해 매일 병실을 찾


아 오셨던 어머님 또한 잘 알고 계셨다. 지금의 말씀은 단지 "예"라는 내 거짓말을 끌어내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그 고마운 마음은 감사히 받을 수 있으나, 이 자리에서 거짓을 말할 만


큼 난 망나니가 아니다. 한동안 내 말없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저씨가 나와 어머님을 번갈아 


쳐다보시며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 가신다. 




"늦었다. 자고 가라. 당신이 작은 방에 자리 좀 준비하고.. "


"아빠! 대답은.. "


"한번 뿐인 네 결혼이다. 생각 좀 해 보마 " 




유경의 말에 방으로 들어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시던 아저씨가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시는 


듯 망설이신 후 어렵게 말을 꺼내고 방문을 닫으셨다. 




"오~ 형부 멋진데요. 소득은 없었지만.. 킥킥 "


"시끄럿 이 년아. 지금 누구 놀리는 거야! "


"언니는 괜히 나한테 그래. "




희경이 유경의 눈치를 보다 아저씨가 들어간 큰방으로 사라지고, 어머님과 유경이와 함께 아


저씨가 서제로 사용하는 듯한 작은 방에 들어갔다. 




"불편하더라도 오늘은 여기서 묵게. 결혼하면 그땐 유경이 방에서 자면 되니까.. "


"엄마! "


"이것이 속으로 좋으면서 괜히... "




딸과 엄마는 나이가 들수록 동갑 친구가 되어 간다더니, 그런 둘의 다정한 말싸움조차 부러


움으로 다가왔다. 투박한 나무 의자를 방 한 켠에 치우고 그 자리에 사각거리는 새 이불을 


가져와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약간의 어색함을 느끼고 있을 때 조금전 사라졌던 희경이가 


돌아와 내게 한 벌의 체육복을 내밀었다. 




"아빠가 이거 입으시래요. "


"그 양반은.. 처음부터 잘 해주면 될 걸 꼭 이렇다니까. 누가 심술보 아니랄까 봐. "


"그래도 형부가 싫지는 않은가 봐요. 헤헤. "


"옷 갈아 입고 셔츠와 양말은 내어 주게. "


"아침에 집에 가서 갈아 입으면 됩니다. 어머님께서 손수 상까지 차려 주셨는데 이것까지 부


탁드릴 수 있나요. 어머님. 저도 염치가 있지요. "


"여기서 아침먹고 바로 출근하게. 옷 하나 빠는 게 뭐 어렵다고. 결혼하고 평생 한 일인데. " 


"그렇게 해. 자기야. 조금있으면 처가집이 될 건데 편하게 해. "


"이 년이 지 엄마를 식모로 아네. 니 서방될 사람 옷이니 니가 빨아! "


"아이 엄마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옷 하나 빠는 거 안 어렵다며.. 헤헤. "


"형부, 그럼 제가 해드릴까요? 저도 빨래 잘 하는데.. "


"넌 니 빨래나 해. 평소에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년이.. "


"언니는 나한테만 자꾸 그러네. 미래의 형부인데 내가 하면 안돼? "




세 모녀의 엄청난 잔소리를 뒤로 한 채 화장실에서 뜨거운 물로 씻고 나오는 동안에도 그녀


들은 서제에서 아직도 누가 빨래를 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 악의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냥 


제가 할게요."라고 이 상황에서 눈치없이 말을 해볼까 하는 장난기가 올랐지만, 지금까지 이


런 분위기를 느껴 본 적이 없기에 조용히 서제에 들어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세 모녀를 신기


한 눈빛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나이는 헛 먹는 것이 아니라고, 내 얼굴에서 오늘 하루동안 


쌓인 피로를 눈치챈 어머님이 먼저 자리를 일어나며 두 딸에게 말씀을 하신다. 




"이 년들아. 우리 때문에 쉬지도 못 하겠다. 자넨 이만 쉬게. 피곤한 것 같으니.. "


"고맙습니다. 어머님. 아침에 인사드리겠습니다. "


"형부 푹 주무세요. 아침에 봐요~ 언니는 안 나와? "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어머님이 먼저 자리를 뜨신 후에도 머뭇거리고 있는 유경에게 희경이 


문앞에서 말을 해 왔다. 




"할 말 있어서 그래. 먼저 나가. "


"문 닫고 불 꺼 줄까? 킥킥 "


"이 년아! 그런거 아냐. "


"형부, 제가 밖에서 망보고 있을께요. 마음 푹 놓으세요. 킥킥.. "


"야! 안 나가? "


"킥킥.. "




"화를 내니 이런 모습이네?"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희경이 닫고 나간 문을 살짝 흘겨 본 


유경이 내 목을 감싸오며 따듯한 숨을 얼굴에 불어준다. 




"자기.. 괜찮아? "


"응. 유자차 먹고.. 유경이도 있어서 괜찮아. 걱정하지마. "


"바로 옆방이니까.. 아침에 깨우러 올께. "




그녀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닫혀진 문에 용기를 내어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덮어갔다. 그녀의 침과 함께 넘어오는 향긋한 유자향이 내 몸속 깊이 숨어있는 감기의 기운


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처음 인사를 드리러 온 날,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두 


어른께 유경의 입장이 안 좋을 것 같아 내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그녀의 어깨에 힘을 주었


다. 짧은 시간 동안에 만들어진 흔적이 그녀와 내 입가에 가득 남아 있었다. 




"이제 나가 봐야지? 어머님도 걱정하실거야.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지만.. "


"후훗.. 왜? 내가 여기서 덮칠 거 같아서 불안해? "


"어. 무서워. 큭큭.. "


"킥킥.. 걱정마. 오늘은 자기 아픈 거 같아서 넘어 가는거야. "




온기를 잃기 싫어하는 겨울새처럼 품에서 벗어날 줄 모르던 그녀가 내 입술에 마지막 키스


를 남기고 문을 열었다. 그 문 앞에서는 귀를 가득 문앞에 모으고 있던 희경이가 머쓱한 표


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


"어라, 벌써 끝난거야? 실망이예요 형부! "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잠시 후 문밖에서는 희경이의 비명과 유경의 앙칼진 소리가 들려


오다 사라져 갔다. 문가에 서서 그 소리를 흐믓한 표정으로 듣다 불을 끄고 준비된 이부자리


에 몸을 눕혔다. 어느세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공간에 이렇게 누을 수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처음 그녀를 병원에서 보았을 때, 그리고 그녀와 옥상에서 이야기를 


했을 때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우연과 우연들이 만나 


엮여진 우리 사이가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인연이 되기를 바라며 감겨오는 눈꺼풀속에 의


식을 들이 밀었다. 




지금 꿈속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는 새벽 거리의 축축한 냄새가 


코속을 간지럽히고, 어디론가 반드시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내 발걸음을 제촉하고 있다. 


이 걸음의 끝이 어디로 이어지는 지는 수 년 동안 지겹게 보았던 것이다. 시장의 한 모퉁이


에 한 여인이 무언가를 끌어 안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달려가려 하지만 내 발은 


바닥에 달라 붙어 떼어질 줄 모른다. 비명이라도 질러 사람을 모으려 해도 입밖으로 세어 나


오는 것은 탁한 숨소리 뿐. 목소리라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누가 던


지는 지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돌팔매질에 온 몸에 성한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인을 감싸주기 위해 달려가려 해도 내 다리는 움직일 줄 모른다. 




마치 이곳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고 누군가 내게 강요하는 듯이 난 철저한 방관


자의 위치에서 그녀의 눈물을 보아야만 했다. 그녀를 힘껏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 엄마라


고 목청껏 외쳐보고 싶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시장 한 가운데서 돌멩이에 맞아 울고 


있던 그녀가 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비가 내려 진탕이 


된 흙탕길에 그녀가 걸어간 발자취에 꽃보다 붉은 핏자국이 길게 꼬리를 내밀고 다가 온다. 


그 참혹한 모습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어느세 그녀가 다가와 내 품을 안아 준다. 비명이


라도 지르고 싶지만, 한번 막힌 입안은 그 어떤 소리도 토해내지 못 하고 있었다. 미칠 듯이 


뛰어 오르는 심장만이 아직 내가 살아있음을 일깨워 줄 뿐이었다. 




"우영아. 이젠 괜찮아.. 괜찮아.. "




엄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릴려고 할 때, 내 얼굴을 감싸오는 따뜻한 온기에 비로소 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열려진 눈꺼풀 넘어로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어느때 처


럼 울고 있는 유경의 얼굴이었다. 




"자기야. 괜찮아? "




비처럼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내 얼굴위로 방울져 떨어져 내린다. 




"꿈을 꿨나 봐.. "




꿈속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 했건만 잔뜩 쉬고 잠겨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괜찮아? "




그리고 또 다시 물어오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잃어버렸던 그림자의 한 부분을 느낄 수 있었


다. 조금씩 변하는 내 꿈의 끝부분이 언젠가 유경의 기억으로 가득차기를 조심스럽게 바라


본다. 그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그녀의 얼굴이 다가와 내 입술에 온기를 불어 넣어 준다. 짜


고 따뜻한 이 느낌은 어쩌면 어릴적 엄마의 양수에서 내가 오랫동안 먹어 오던 그 맛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렇기에 이 맛을 느낄 때 마다 내 심장이 잔잔해 지는 것이리라. 




"고마워.. "




한동안 그녀의 품에 안겨있다가 방을 나섰을 때 부엌에서는 이미 어머님이 새벽상을 준비


하고 계셨다. 눈물로 지져분해진 얼굴을 정리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씻고 유경의 자리 옆에 


앉아 수저를 들려고 하자 내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시던 아저씨가 내게 말해 오셨다. 




"너.. 아직도 꿈꾸냐? "




붉어진 눈동자는 쉽게 감출 수 없는 것인지 아저씨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지


난 수 개월, 한 병실에 함께 있으며 새벽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본 사


람이 바로 아저씨가 아닌가. 어떤 꿈을 꾸는 것 까지는 모르시지만, 가볍지 않다는 것만은 


모르실 분이 아니었다. 아직 허락을 받지도 못 했는데, 혹시나 이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에 내 앞에 놓여진 밥공기만 바라 볼 뿐이었다. 




"이 양반이.. 밥상앞에서! 자네 어서 들게. 시장할건데.. "


"크흠.. "




서먹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어머님이 얹어 주시는 반찬을 오늘도 꾸역 꾸역 먹으며 두 공


기의 밥그릇을 치우고 나서야 식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올챙이처럼 튀어 나온 배로 양치


질을 하고 서제로 들어오자 그녀가 내 옷을 다리고 있었다. 




"어서 옷 입고 같이 출근하자. 헤헤.. "


"후훗.. "




그녀의 앞에서 체육복을 벗고 잘 다려진 양복 하의와 셔츠를 껴입자 그녀가 넥타이를 메주


며 내 얼굴을 바라본다. 벌써 결혼을 한 듯한 모습에 얼굴에 미소가 그려진다. 




"경이는? "


"난 옷 다 입었는데 뭐.. 자기 때문에 화장만 다시 하면 돼. "


"미안.. "




내 말에 그녀가 내 볼을 꼬집으며 살짝 눈을 흘긴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엄마 기다리시겠다. 어서 나가자. "




그녀가 다시 화장을 하기 위해 방으로 간 후 머슥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마루에서 기다리


고 있을 때 버릇이신지 쇼파에 앉아 안경알을 닦고 계시던 아저씨께서 넌지시 말씀을 하셨다. 




"음.. 이번 주말에 시간이 되시면 사돈어른께 뵈었으면 한다고 말씀드려라. "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을 알기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밤사이에 무


슨 꿈을 꾸었는지도 이 순간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불안하게 허락의 순간만을 기다리던 그 


모든 기다림이 드디어 결실을 이루었다는 벅찬 기쁨 뿐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버님. "


"뭐 사돈어른 만나 뵙고 거절할 수도.. "


"어이구 양반아. 또 그런다. 또! "


"크흠.. "




유경의 집에 올 때는 그래도 남이 될 여지가 있는 사이였지만, 지금 대문을 나설 때는 이미 


사위가 된 듯이 챙겨주시는 어머님의 부지런함에 등떠밀리듯이 엘리베이터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함께 출근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그녀와 내가 맞잡고 있는 두 손에 스


며들어 있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그녀의 차를 탈 때 까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입가


의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를 만나 정확한 날짜를 잡는 것. 그 후에


는 매일 오늘같은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깨끗하세 세차된 그녀의 하얀색 레간자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녀가 지금까지 참았던 감정


을 표현하듯 차안에서 급한 키스를 해왔다. 곱게 화장을 한 그녀의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


겨져 오고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이 마른 듯한 내 입술에 촉촉하게 다가와 달라붙 듯이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와 나의 따뜻한 혀가 어울려졌다가 끈적한 소리를 내며 서로


의 입술뒤로 숨어 버린다. 그녀의 콧등에 한 번의 입맞춤을 더 해준 후, 달아오르는 서로의 


감정에 늦어질 것 같은 출근길을 서둘렀다. 




"경아. 출발하자. 이러다가 우리 일나겠어. 큭큭.. "


"왜, 자기 하고 싶어? "


"큭큭.. 일단 출근은 합시다. 마님! "


"오늘은 자기 회사까지 태워줄께. "


"그러면 서울을 한 바퀴 도는 건데.. 안돼. " 




서로 걱정하는 눈이 마주쳤지만, 물러서지 않고 쳐다보고 있는 유경을 난 언제나 이길 수가 


없었다. 그 눈빛속에 날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벼운 웃


음과 함께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녀가 운전하는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와 출


근하는 다른 차들과 함께 도심속을 스며든다. 




"훗.. "


"차로 왔다 가는데 힘들 게 뭐 있다고. 오늘은 내 말대로 해. 아침에 자기 보고 내가 불안해서 


안돼. "


"내가 무슨 애야? "


"자긴 내 앞에선 늘 애야. 회사갈 때도 내가 손 잡고 바래다 줘야 안심이 돼. 큭큭.. "


"참네. 이거 왜 이래. 아버지가 늘 하시는 말씀이, 나보고 어른스럽다였어! "




내 말이 끝나자 말자 그녀가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아 왔다. 




"자기야. 어른스럽다는 어른이라는 말이 아냐. 어른을 흉내낸다는 뜻이지. 아버님도 자기를 


애라고 생각하시는 거야. 큭큭.. "


"에효..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라디오 틀어도 되지? "


"응. "




그녀의 차안에 오디오를 조작해 라디오를 틀었다. 한동안 지직거리는 라디오 특유의 잡음


이 들리다가 광고가 나오는 채널을 몇개 건너띄어 이제 막 한 곡의 음악이 끝난 것 같은 채


널에 고정시켰다. 곧이어 푸른 기운이 사라지지 않은 새벽 도심을 달리는 하얀색 레간자 안


에 30대 초반인 듯한 여성의 나른한 목소리가 가득 울리기 시작한다. 




"오늘 두 번째 신청곡입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 들으시고 싶다고 Y라는 분께서 사연을 남겨 


주셨네요. 힘든 유학생활할 때 이 노래를 들으며 힘을 얻으셨다구요. 귀국해서 사랑하게 된 


남자를 만나게 된 후 이 노래를 한동안 잊었다가 헤어지고 다시 듣고 싶어졌다고 신청하셨


네요. 애인분과 헤어지고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해 드려야 할까요? "




차분하게 읽어가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 또한 그 사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헤어짐이라는 


것은 일방적이기에 남겨진 자의 감정은 늘 혼자 감당해야 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 그의 사


연을 듣고 위로한다고 해서 가슴속 가득한 그 갈증을 해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생


각을 담아 유경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경이도 남자랑 헤어지고 저렇게 라디오에 사연 보낸 적 있어? "


"큭큭.. 남자랑 헤어졌다고 동네방네 떠든 적 있냐고 묻는 거랑 같잖아. 큭큭.. 저러는 거 난 


솔직히 이해를 못 하겠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


"호오. 경이 생각보다 강한데? "


"자기야. 사랑하다가 헤어졌다고 떠난 사람을 못 잊어 저런다면 지극히 이기적인 거야. 내 


감정을 상대에게만 전가시키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자기도 광고를 해서 알거 아냐. 인간의 


감정은 연속적인 스펙트럼이 아냐. "




진지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며 운전하던 그녀가 잠시 고개를 돌려 조수석의 내 얼굴을 바


라보며 장난섞인 웃음을 보여준다. 




"성인이 사랑한다는 건 혼자 남겨졌을 때 스스로 감내할 수 있는 힘도 있다는 뜻이잖아. 그


걸 모른다면 자기처럼 애야. "


"좋겠다. 애랑 결혼해서.. "


"애든 어른이든 자기니까 좋은 거지. 알면서. 킥킥.. "


"큭큭.. "




그때 음악 선곡이 끝났는지 라디오에서 나른한 목소리의 여성이 조금전 사연에 나름의 대


답을 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함께 했던 그때를 떠올려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도 지나간 사랑은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요? 카라 보노프가 부릅니다. The Water is Wide. "




DJ의 음악소개와 함께 새벽에 어울리는 카라 보노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안을 가득 채


우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그 노래에 흠뻑 빠져들었다. 오래전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의 그 기분이 아련하게 밀려왔다. 진한 헤이즐넛 커피와 함께 들었던 The Water is Wide을 


따라 부르자, 운전을 하고 있던 유경이 재미있다는 듯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 




"The water is wide I can"t cross over     바다가 너무 넓어서 건널 수가 없어요. 


And neither have the wings to fly      날아 갈 수 있는 날개도 없는 걸요.


Give me a boat that can carry two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배를 주세요.


And both shall row, my love and I     그러면 내 사랑과 함께 저어 갈게요




love is gentle and love is kind       사랑은 부드럽고 온화하지요


The sweetest flower when first it"s new  처음 꽃피울 때는 가장 향기로운 꽃이지만


But love grows old and waxes cold    사랑도 나이가 들면 밀랍처럼 굳어버리다가


and fades away like morning dew     그리고는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지요.




There is a ship and she sails to sea   배가 있네요. 바다로 흘러가네요.


She"s loaded deep as deep can be   짐을 가득 실고 있지만


But not as deep as the love I"m in    당신에게 빠진 내 사랑 만큼 가득하진 않아요


I know not how I sink or swim "      내 사랑이 가라앉을지 헤쳐나갈지는 모르겠어요




"이 노래 좋아하나 봐? "


"예전에는.. "




오래전 턴 테이블 특유의 톡톡 튀는 음반으로 들었던 곡이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을 떠올리


게 만들었다. 그 기억은 진하게 우러난 커피향이었다. 내가 있기에 너가 있다고 착각하고 살


았던 시간에, 들을 수 없는 노래를 내 입모양을 보며 따라 불렀던 한 여인의 모습이 내 시선


이 멈춘 창밖 넘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녀가 끓여 준 진한 헤이즐넛 커피의 향이 오랜만에 


마시고 싶어졌다. 그녀가 끓여 준 커피잔을 받으면 늘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맛있네요. 고맙습니다. "


"응? "


"아냐. 혼잣말이었어. 후후.. "




한강위로 아침 해가 노란 빛줄기를 흩뿌리며 떠오르기 시작하고, 도시 문명의 상징인 철교


를 그녀와 내가 타고 있는 차가 내달리고 있다. 출근해서 이 노래를 한번 찾아 들어야 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감기 33편 개미의 날개 20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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